고백하는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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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17:20-26),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19-06-02 13:43
조회
94


요한복음 17:20 - 26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7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7장의 기록배경은 아주 조용한 저녁시간이었죠.
차도 다니지 않고, 그래서 조용했을 겁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이들과 식탁에 둘러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시죠.
도중에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에 차시고 대야에 물을 받아 한 사람씩 제자의 발을 씻겨가십니다.
갑작스런 행동에 제자들은 당황했을 것이고 몸 둘 바를 몰랐을 거에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랑의 손길로 하나씩 그 발을 안으면서 씻어가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자들 마음은 굉징히 행복했을 거에요.
이 시점에 다른 복음서에는 성찬제정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내 몸이니... 이것은 너희를 위한 새 언약이니..."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아닙니다.
오로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만 나오죠. 여기만 나오는 특징입니다.
바꿔말하면 예수님의 성찬이 곧 발을 씻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저자에게 중요한 건, 예수의 몸과 피를 마시는 건 제자들 발 씻기는 것과 동격이었다는 겁니다.
마치 이를 통해 주님의 몸과 피를 먹는 사건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것.
발을 씻기는 것은 예수와 제자가 한 몸이 되는 사랑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성찬은 사랑의 나눔이고 발을 씻기는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위로와 희망의 이야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17장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건 헤어짐의 시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제자들 발 씻겨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는데, 그런데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
헤어짐은 죽음입니다. 죽으러 가시는 거죠.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아무튼, 예수님은 긴 설교를 하셨습니다.
가슴 속에 대못을 박듯이 구구절절,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을 하시고 기도하신 거에요.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가 안 나옵니다. 그저 사랑의 나눔과 사랑을 유지하라는 권면, 권고가 나올 뿐이죠.
요한복음은 사실 처음부터 사랑, 함께하심이 계속 나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이처럼 '함께'가 요한복음을 대표하는 신학입니다. 바로 포도나무 신학, 15장 이야기 말이지요.
처음부터 예수님은 요한복음을 통해 함께하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것이 키워드 아니겠어요?
24절을 보세요.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도 나와 함께 있어.."
17장은 기도 이야기 입니다.
대제사장의 기도.
그러다보니 거의 다 간구형이이지요.
그런데 오늘 24절은 그런 간구형이 안 나옵니다.
원문을 직역하자면 "아버지, 이 백성들을 꼭 내 곁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입니다.
하여 주시옵소서가 아니라요.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담긴 동사형을 사용하고 계신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 대하여 선포하듯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백성을 내 곁에 두겠다. 무슨 방편을 강구하더라도 그리 하겠다 하고 계신 겁니다..
한편, 18장을 가면 예수의 죽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배반 이야기가 나오지요.
잠시 뒤면 죽고, 배반당할 분이 어떻게 저들을 자기 곁에 두신다는 겁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확신하는 근거,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게 17장 마지막에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입니다.
죽는 사람이 죽으러 가는데 여러분을 꼭 내 곁에 두겠다?
예수는 비록 죽으러 가시지만, 이를 돌파하시겠다는 거다.
정공법으로 돌파하여 죽음에서 승리하시겠다는 것, 죽음조차 승리를 방해할 수 없게 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무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20-23절, 24-26절.
전자는 하나됨입니다. 후자는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고요.
예수님은 죽음을 불사하고 인간이 배반하는 것조차 아랑곳 안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결의, 결단하고 계신 겁니다.
내 곁에 둔다는 건 내가 함께한다는 거고, 그 안에 거한다는 겁니다. 23절처럼.
곁에 둔다는 건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 하나의 근거는 삼위일체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러니 예수를 믿는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뭡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되심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이시기에 그 안에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곁에 두고 싶은 이유는 하나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될 때 우리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돌리고는 합니다.
그러나 본질, 신학적으로는 우리 모습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가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건? 동행하심은?
예수님이 꼭 이 사람들을 곁에 둔다는 건 예수님이 동행하심을 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의 길을 따라간다는 말이 됩니다.
여행안내자의 말을 들으며 따라가는 것.
그런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죽으러 가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릴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간혹 힘들고 연약해서 예수를 배반할지라도,
예수는 그것을 뛰어넘고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을 살 때, 때론 힘들고 주를 모른다 할 터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어 줄 지라도 함께 하시길 소원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길 원합니다.
함께 할 때 여러분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됨을 기억하고 그런 길을 걸어나가길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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