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는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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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요18:1; 행2:1-4), "성령강림절"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19-06-09 16:10
조회
80


요한복음 18: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사도행전 2:1 - 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은 18장 1절을 읽었지만, 성령강림절이라는 절기를 당하여 성령강림이라는 행 2:1-4를 중심으로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기독교에는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지난 번 우리는 사순절을 함께 지냈고 부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가신 후 50날, 50일입니다. 다섯 오, 열 순.
그래서 오순절입니다. 헬라어로는 팬테코스테. 팬테는 다섯, 코스테는 열.
이 날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이라 합니다.
한국교회는 요즘 조금씩 의미를 되찾는데, 안타깝습니다.
이 기간을 맥추절 등으로 지킵니다.
물론 구약적으로 의미가 다 있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볼 때는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게 맞습니다.
사실 외국은 이날이 잔치죠.
한국은 성탄절이 제일 큰 절기이지만 외국은 부활절, 그 다음이 성령강림절이 제일 큰 잔치입니다.
사실은 오순절이라는 단어는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성령강림주일이라 생각 표현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또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이라 가능하지만, 정식으로는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 50날 후에 발생했으니까 오순절이라 해도 좋지만 신학적으로는 성령강림절이라 해야 바르다는 거죠.
그런데 성령강림이라는 사건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러 목사님들, 신학자들이 강림절의 의미로 여러 의미와 해석을 내놓습니다.
다 맞다 틀리다 하기는 어렵고, 어쨌거나 많은 분들이 여러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게 현상에 주목해서 해석을 한다고 말씀을 드려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바람 처럼, 바람이 아니고. 또 불의 혀처럼. 이렇게 써있으니까요.
이를 두고 어떤 교회는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면 솰라솰라 방언을 한다, 그게 성령강림절이다! 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뭐, 좋게도 볼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런 해석은 우리가 마음에 담아두되 부산고백교회는 이런 해석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오늘 드리려 합니다.
성령강림을 우리는 크게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측면입니다.
교리는 어느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의 내규 같은 걸 말합니다.
기독교는 이렇고 저렇고.. 이렇게 믿어야 하고 주일은 이렇게 섬겨야 하고 등. 그것이 교리입니다.
또 하나는 이를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구속사라 합니다. 구원해서 속량하다+역사.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속량하시고 구원해가시고 이루어가시는 일련의 일들을 기록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는 교리적으로, 하나는 하나님이 우릴 위해 일하시는 구속사적으로 성령강림절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역사적으로 먼저 이해를 해봅시다.
하나님의 역사가 흘러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임했지요. 이것을 어찌 이해햐야 할까요?
구속사적으로는 복음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냥 머물러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 출발점이 성령강림절이라 이해한다는 겁니다.
로마 이디오피아 아시아 북유럽으로까지 계속해서 확장, 뻗어나갔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하신 말씀이 단순히 갈릴리나 예루살렘에 머무는 게 아니라요.
가나다를 아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겠어요? 바로 성령강림절로 말미암아.
그래서 복음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를 세우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가는 출발점인 겁니다.
구약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협의의 개념으로 있었습니다. 광야교회, 예루살렘 성전으로.
그러나 이제 성령강림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만방에 세워지는
출발점, 선포식이 바로 성령강림절이라고 구속사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날에는 하나님의 교회, 나라가 각 지방 각 나라에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담지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행 2:4를 보면 다른나라 언어,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방언과는 다릅니다. 단어가요.
가나다를 아는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덕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 여기의 ‘다른 언어’는 원어가 다릅니다.
다른 언어란 오직 다른 나라 말, 외국어를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이 이제는 유대땅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에 세워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 날로 인해서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람도 예수를 믿고, 부족한 나도 예수를 믿게 된 겁니다.

두번째 측면은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데, 교리적, 교의학적 측면에서의 강림절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이전부터 계셨습니까, 아니면 강림절부터 오셨습니까?
바로 아셔야 합니다.
성령강림이 일어나기 전에도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창조하시는 순간부터요.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 하는 그분이 성령하나님이십니다.
그 후에는 사람을 불러세우십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사사들,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요.
삼손의 힘 빠짐은 성령님과 관려이 있습니다.
다윗이 남의 여자와 간음했을 때, 그는 자기 이부자리가 다 젖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하길 당신의 영이 내게서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이 세상에 강림하시고 존재하셨음을 결단코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림절 전부터 성령이 계셨습니다.
예수의 잉태가 그렇습니다. 또 그 사건을 통해 시몬, 사가랴가 기쁨에 충만했습니다.
그 후에는 제자들을 통해 역사하셨고, 병 고치고 귀신 쫓음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으로 인해 성령이 임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미 삼위하나님의 한 분으로 창세 때부터 예수 오시기 전과 후와 오시고 오신 후에까지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럼 벌써 왔으면 됐지 왜 성령강림절이 뭔 필요냐 하시겠지요?
맞습니다. 이게 우리 질문이 되어야 성령강림절을 바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현상에 주목하기 보다는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데 왜 성령강림절이 필요하냐.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별히 아까 다윗을 말했는데요, 성령이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함께 하긴 했는데, 또 다른데 갔다는 겁니다. 예수 오시기 이전까지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 믿는 건 뭔가요? 예수와 하나됨입니다.
예수와 함께 연합된다는 것.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우리는 예수께 접붙임 받은 한 몸입니다. 동일한 인격체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오시기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강의를 한다면 풀어서 할 수 있겠지만 설교시간이니까 조금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내와 연애를 오래 하지 않았습니다. 두 세번 만나고 결혼했지요.
그런데 연애를 오래 했다고 쳐요. 그리고 같이 살아요. 그냥 살아도 부부처럼 보입니다.
굳이 결혼식을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식을 올리는 것.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성령강림절을 이 결혼식에 비유해요.
결혼 안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있는데, 사람들이 꼭 식을 올리는 이유.
잘 살던 사람도 늦어서라도 꼭 식을 올리려는 이유.
결혼식이 참 중요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를 조금 다르게 성령강림의 측면에서 보면요?
성령님은 여전히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이전부터요.
그런데 예수님 오심으로 인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전처럼 성령이 오시는 게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오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지체가 되는 것이고, 예수와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로 인해 그분과 한몸을 이룰 때 예수의 영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접목, 연합, 지체가 된다는 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이고,
예수 안의 성령하나님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을 선포한다는 겁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까지는 성령님이 나와 with, 함께하셨다.
그런데 이날로 말미암아, 내 안에 거하는, with in 하는 거라고 말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입니다.
이를 오늘날 조직신학자들이 인용해 사용합니다.
이제까지는 동거였다면 이제는 예수와 함께 결혼을 한 것이고, 이를 성령강림을 통해 선포했단 뜻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표현. 성령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현이 틀리진 않습니다만,
강림절의 측면에서 보면 내 곁이 아니라 내 안에 내주하시는 겁니다.
그 내주하심, 이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성령강림절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성령이 떠나시는 걸 알았습니다.
왔다가 때로는 내 마음이 이상해졌을 때는 떠나는 사실을 다윗은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성령님이 떠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와 결혼하셨기에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분과 결혼생활을 해야 합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두 사람은 더욱 성숙해집니다.
처음에는 티격태격 하던 것이 갈수록 저와 내가 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와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영이 내 안에 거하게 되며,
예수와 함께, 성령님으로 인해 내가 더 성숙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바람처럼 불처럼 다가옵니다. 뜨겁게도 냉하게도요. 결혼생활이 그러하듯이요.
그 뜨거움으로 인해 예수처럼, 내 삶을 포기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내 속에 들어오고 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를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
성령은 눈에 안 보여요. 따뜻한 바람이 불면 그 사람이 만나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점점 내 자아가 깎입니다.
내가 고파도 자식, 배우자를 위해 나는 좀 굶어도 되는 것처럼.
사랑하니까 그런 겁니다. 성령충만은 예수에 대한 사랑이란 말씀이지요.
그래서 성령으로 내 삶의 방식이 마치 바람에 날려가듯이, 조금씩 나는 날려가고 예수와 하나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성령하나님은 우주 만물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으로 더불어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일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겁니다.
이를 기도로 담아낼 수 있는 이유도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연합했기 때문에요.
권태기. 영적 권태기라는 게 있습니다.
매 주 교회는 다니는데 엄마가 오라 하니 가고.
그런 권태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가 나를 사랑하심을 다시 상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바람이 입니다.
내 마음이 조금씩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살아야 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게 성령충만이에요.
여전히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데, 내 것만 생각해서 보지를 못하는 거에요.
우리가 예수님과 결혼을 했는데 그 뜨거운 영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결혼은 했지만 여전히 나대로 살겠다는 빈깡통과도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상대를 계속 용서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내것을 무디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와 합하여가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는 능력이 계속 돋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18:1을 보면 기드론 시내가 나옵니다.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 동쪽으로 하나의 계곡이 있습니다. 그게 기드론 계곡이고, 그 맞은편이 겟세마네 동산 입니다.
즉 18장 1절은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기드론은 흑암의 골짜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삼나무 잣나무가 많아 우거져서 까맣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성경을 원어적으로만 보면 예수님 잡힌 시기는 유월절, 보름달이 뜬 밝은 날이에요.
군에 가면 보름달이 뜨면 행군을 안 합니다. 적에게 발각되니까요.
그럼에도 군병들은 횃불을 들고 왔습니다. 밝은 날임에도요.
이건 다음 주에 설명드릴텐데, 예수는 아무튼 기드론 암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분이 흑암의 골짜기로 자신만만하게 내려가셨을까요?
성령님이 함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굉장히 주도적으로 활동하십니다. 그까짓거 뭐! 죽음이 무섭지 않다!하면서.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내려갑시다.
성령님이 함께 계시잖아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성령님과 함께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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