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는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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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 18장 28-32절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19-09-15 14:26
조회
120
 



 

 

 

요한복음 주일강해설교 18장 28-32절

 

지난주에 이어서 28절 이하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베드로의 자기 집착적인 사랑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끌려가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심정적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저자는 베드로의 그 연민의 정을 비극적인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주가 분명히 따라오지 말라 했으나 베드로는 자기의 심정적인 의미에서 예수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것이지요.

마치 자신의 예전 약속을 지키겠다는 심정으로 예수를 따라갔으나, 결국 베드로는 예수를 부정했습니다.

아니 그것도 그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정함으로 예수를 부정하고 배반 한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그가 사랑했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사랑은 본인이 만들어내었던, 그가 믿으려 하고 그가 가진 종교적 신념에서 만들어진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조차도 주님이 베드로 안에 넣어주셨을 때 그제야 베드로는 진정한 사랑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죄인에게 독생자를 주셔서 예수가 죽어가는 사건.

하나님의 사랑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모든 것이 상실되고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이라고 어떤 신학자는 말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해석된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고 너무 익숙해져있습니다.

인간의 신앙과 신학으로 착색된 십자가.

그러한 해석된 십자가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젠 내 영혼 안에 그 감동이 울려 퍼지지 않는 것.

또 십자가야? 하며, 매일 듣는 십자가.

그러니 그 안에 나의 고동을 울리는 감흥이 없습니다. 너무 익숙하고 너무 잘 해석되어 있어서, 자기만족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물론 그마저도 큰 의미가 있기에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해석된 십자가 이전에 예수가 왜 죽으셨지? 그를 매단 사람은 누구야? 하는 원초적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석된 십자가 이전에, 실재적 시간 속에서 예수를 매달 수밖에 없었던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이 십자가가 생생하게 들려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왜? 그게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요한이 말하는 세 가지 유형의 그룹이 있습니다.

베드로, 예수를 사랑했던 그 사람이 바라본 십자가. 아마 우리 모두가 베드로에 속해있는 지도 모릅니다.

두 번 째는 유대인. 28절 이후에 나오는 이들입니다. 유대인이란 단어는 신약에 약 82번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에는 딱 한 번 씩, 누가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행전에서 30여 회가 나옵니다. 반반이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무슨 의미입니까?

당시 종교가 십자가를 바라봤던 이유, 관점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다음 주에 하게 될 빌라도 유형, 바로 정치입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 곧 정치적 인간이란 의미입니다.

오늘은 막강한 신앙을 가지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했던 이들의 십자가 이해를 살핍니다.

28-31절까지를 묵상을 해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관청으로 데려갔습니다. 새벽이었죠. 그러나 자신들은 그 안으로 안 들어갔습니다. 관청은 이방의 집이었기 때문에요.

그러자 이제 빌라도가 나옵니다. 너희는 왜 고발하느냐?

유대인은 말합니다. 이는 악한 짓을 한 자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재판해서 죽여주십시오.

빌라도는 말합니다. 데려가 너희 법대로 하라.

유대인은 말하길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답합니다.

이 속에 숨겨져 있는 유대인들의 엉큼함을 읽어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진리, 거룩성을 사수하기 위해 관청이란 이방의 집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죽이려고 왔는데, 사람은 죽이면서 본인들은 거룩성을 지키려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요한복음 저자가 유대인의 이중적 모습을 고발하는 형태로 적혀져 있습니다.

자신들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관청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마음속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폭력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척 하며 한쪽으로는 이웃을 죽이려는 폭력성 말입니다.

또 우리에겐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선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 입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을 목도합니다.

유대 관점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손으로 예수를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32절에 각색하기를, 이는... 함이라 합니다.

예수는 자기가 매달려 죽는다 했습니다. 이를 요한이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죠.

우리가 보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보자면, 유대인은 예수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권위와 힘으로 죽이려 했지요.

우리는 이 부분을 어찌 봐야 할까요?

세상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이 말하는 진리의 양면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빌라도는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것은 사실 진리의 문제인 겁니다. 유대인은 자신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예수를 죽였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유대종교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세상종교가 만들어 낸 진리는 이처럼 양면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를 통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그대로 사수하려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종교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런 종교성이 배어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굉장히 폭력성으로 나타나고요.

인류사로 볼 때 전쟁은 종교에 의해 시작된 경우가 꽤 많습니다.

왜? 자기가 믿는 종교, 그 진리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것이 이념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 종교의 한계성, 폭력성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진리를 추구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이들이 추구할 진리가 뭔지 알고 그걸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기독교가 이념이 되고 교리가 이념이 되어 그것을 우리가 철저히 관철하려 한다면 우리 또한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 진리란 무엇입니까?

많은 이들이 기독교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격 그 자체입니다.

예수 본인이 17장에서 진리를 이야기 합니다.

진리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 말씀이다 하십니다.

내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내가 사람을 죽이고 아프게 하면 진리가 아닙니다. 한국을 보면 드러납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하는.

성경은 나 자신의 거룩을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이를 두고 14장에서 예수께서 말하시길 내가 진리야,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께 못 간다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진리입니다. 문재인이, 자한당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 내가 다가가고 있는지, 스스로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고, 그것이 예수입니다. 그 길이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 자기 자신을 세우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안에 자신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고 교회생활을 해도 계속해서 우리는 이념적인 것을 찾고, 그것이 참된 진리라 목을 맵니다.

나도 주일성수를 하라 외치지만, 이로 인하여 부모와 이웃을 죽이면 주일성수 해야겠습니까?

종교인, 정치꾼이 말하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오늘 에스겔서 13장을 읽었습니다. 사람마다 부적 두르고 머리띠를 띠고. 띠는 부적입니다. 하나님 믿는다면서 이러는 건 종교생활 하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어떻게 부적으로 대체됩니까? 이는 유대교가 종교가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우린 종교를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린 예수쟁이지 종교인이 아닙니다.

이 사실에 자기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처럼 폭력적인 종교인이 저지른 것이다.

십자가는 사랑이고 하나님의 섭리지만, 그 이전에

십자가는 인간들의 종교성이 만들어낸 살인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만큼 관념화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비뚤어진 종교성이 아닌, 나를 확인시켜주는 참된 십자가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간 나조차도 하나의 종교꾼이 되어버린 채 살아갈 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요한은 깨달은 것이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집착적 사랑으로 예수를 사랑하지 말라고 한 번 경고하고, 두 번째는 종교에 미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16세기 때,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잘리우스가 있었습니다. 해부학의 아버지. 그는 의사인데 사람이 죽은 시체를 자주 만졌죠. 그러다보니 남녀의 갈비뼈의 수가 똑같은 것을 알고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회에서는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그를 사형에 처했습니다. 성경대로라면 남자의 갈비뼈가 하나 비어야 했기 때문이죠.

그 당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잘 믿는 사람들이었기에 그것을 교리로 여겼습니다. 말씀보다는 인간에 의해 해석된 결과물을 하나님이 주신 양 믿었다는 것이죠.

또, 지구가 돈다고 했던 갈릴레오가 결국 나중에는 미쳤다고 합니다. 교회가 그 사람을 못살게 군 때문이지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와 유사한 사건이 베드로의 사건이고, 유대인이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은 사건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런 이념화, 신념화, 교리화 즉 화석화된 교리 위에 세우지 말고, 지금도 말씀을 건네고 계시는 성령하나님 위에서 진리를 따릅시다.

그렇게 가정을, 나를 개혁해 갑시다.

내가 습관적으로 해오던 것이 나의 결단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이념에 사로잡힌 자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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