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는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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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 19장 1-6절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19-10-13 17:26
조회
45
 

 



 

 

 

"보라 이 사람을"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19장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을 함께 나누고 생각하겠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누구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찾는 자세를 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 개념, 우리가 소유해왔던 모든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고 우리 삶 속에 코페르니쿠스적 대격변이 일어나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닌 진리란 누구인가 하는 게 바른 질문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 삶이 변화되는 것이 진리라 했습니다.
말씀으로 제시되는 예수를 만남으로 그분을 따라 사는 삶이 있길 소망합니다.

예수는 유대인에게 고발당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를 시기했는지 우리는 그간 잘 살폈습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를 죽이려는 것은 5장에서 드러납니다.
38년 동안 질병으로 힘들어했던 한 영혼,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푸념했을지도 몰랐을 사람.
인생 자체가 괴로움으로 가득했던, 숨만 까딱거리며 죽지 못해 사는 삶.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었던, 38년간 병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헤아릴 수밖에 없던 사람, 그런 사람을 예수가 치료하신 겁니다.
항상 인생에서 꼴등으로만 살아온 사람. 그래서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분명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조차 받을 수 없는 인생이라 비관 하는 삶. 거기에 하나님의 빛이 들어가기 시작한 겁니다.
빛이 밝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치유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치유사역이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 흐뭇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정죄하려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가 안식날 그토록 처연한 삶을 살아온 이를 치유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죽이고자 살의 가득한 마음을 내비친 자들, 그들이 유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막무가내 삶을 살아온 이도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온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삶을 바쳤던 이들.
그런 마음에 살의가 드러났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너무 잘 믿고 사랑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거룩이란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도 우리에게 바리새보다 거룩한 삶을 살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거룩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거룩은 내가, 종교가 만드는 거룩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거룩은 안식날이라 할지라도, 병들고 시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고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바라바를 석방시킬 수밖에 없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생각과 비뚤어진 고집으로 살인, 강도, 민란을 일으킨 살인자, 그런 바라바를 살리는 한이 있어도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에 갇힌 자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빌라도는 크게 세 번이나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단언합니다.
그 당시 지역을 지배했던 총독의 입에서 이 사람이 죄가 없다고 공포하고 선언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죽이려 하는 유대인의 모습.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난감합니다.
결국 바라바 대신 예수가 죽음에 처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살인자, 사형수 바라바 대신 전혀 죄가 없던 예수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8장 후로 바라바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 참 궁금해집니다.
스웨덴의 한 작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가 바라바라 하는 책을 썼습니다. 1950년대 경의 책입니다. 거기서 바라바는 내가 왜 풀려났지? 왜 예수가 죽어야 했지? 하는 양심의 소리에 평생을 시달렸습니다. 그리고는 주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며 죽어갔더라 하는 소설입니다.
그랬을 것 같습니다. 졸지에 생명을 얻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로 지목되고 심판받던 그가 졸지에 예수로 인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구사일생. 그가 풀려나 무엇을 했을까요?
우리는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페루라고 하는 이 소설가의 이야기는 충분히 상상할 만 합니다.
우린 여기서 이 바라바의 모습을 통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곱씹어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바라 하는 사형수와 뒤바뀌는 순간.
죽을 이가 살고 살 이가 죽는 이 뒤바뀜의 찰나, 정황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극, 그것이 어쩌면 내 인생 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이는 마치 죽어야만 했던 내가 살아나고 살아야 할 예수가 죽어가는 사건, 그와 동일한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사건으로 인해 여기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영문을 몰랐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했는지. 그러나 그는 전적으로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라바이자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18장이 막을 내리고 19장엘 들어갑니다.
죽어서는 안 되는, 죄가 전혀 없던 이분이 바라바를 대신해 죽어가는 것. 즉 그분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 바로 19장 1-5의 이야기입니다.
바라바를 통해 죽어가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요한복음 저자가 써내려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자의 마음으로 읽어야 이 부분에서 우리가 축복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19:1-5까지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관식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예수가 왕으로 등극하는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죽어가는 작자, 그가 왕이라는 것.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대관식의 시작은 어떠 합니까? “채찍질”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선포합니다.
3절!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하면서 때립니다. 카이레, 호 바실레우스(Χαῖρε, ὁ Βασιλεὺς). 아베, 카에사레.
군인들은 지금 유대인의 왕이여! 하고 선포하지만, 이는 저자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가 왕으로 세워졌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본문을 통해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왕이십니까?
채찍에 구타까지 당해도 힘 없던 왕,
그러나 바라바, 그리고 우리를 살리는 왕이셨습니다.
오늘 사50:6의 말씀이 예배로 부르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뺨을 때려도 수염을 뽑아도 등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바라바와 우리에게도 죄 용서를 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읽었던 본문 19장 4,5절을 보면 “빌라도가 다시 밖으로 나가되...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더니..”
5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한글로는 잘 표가 안 나지만 자색 옷을 입고 나오다 할 때 나온다는 것은 바깥세상에서 이곳으로 들어온다 하는 표현입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를 뒤로 하시고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다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왕으로 등극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요한복음과 다르게 자색 옷을 벗으십니다. 그리고 입었던 옷을 다시 입고 못 박히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안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끌고나왔다는 인상을 없애기 위해 5절에는 예수가 자색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세상에 등극하셨다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즉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가 자색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자기 스스로의 발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4절은 대관식 준비 위원장이었던 빌라도가 우리의 왕을 소개한다는 식으로 아나운싱을 한 것처럼 보이고, 이제 예수가 모든 의관을 갖추고 세상에 등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 입니다.
그게 우리가 바라 봐야 할 왕입니다.
그러면서 빌라도가 하는 말이 보라 이 사람을. 합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여러 책의 모티브가, 또 니체의 마지막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또 보첼리노라는 화가가 이를 모티브로 그리고 난 후에 많은 화가들이 저마다의 해석, 신학으로 이를 그렸습니다.
예수가 왕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길 바랍니다.
인간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짓밟힌 모습으로 예수가 우리의 왕으로 등극하신 겁니다.
바라바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죠.
우릴 살리기 위해서는 그러해야 했다는 것.
그것이 예수의 모습입니다.
왕이신 예수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왕과는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왕, 예수의 모습은 세상이 말하는 왕과는 너무 다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본회퍼라는 이가 “보라 이 사람을!” 이란 글을 썼습니다. 이는 이사야서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모습은 성공을 지향하는 모든 사고와 생각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성공한 자의 대변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실패자가 성공한 자를 전복하기 위해 봉기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심판 가운데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모습은 성공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화려한 자색이 아닌 피로 범벅된 자색 옷입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신 모습으로의 왕.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 죄를 다 도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공한 자의 왕이 아닌 실패한 자의 왕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머금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심판을 받기 바랍니다.
심판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입니다.
그 길목에 예수가 서 있기에 가능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빌라도가 말할 때 정작 그는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눈으로 그를 볼 때 어떤 감동이 옵니까? 어떤 눈으로 그를 보고 있습니까?
빌라도가 보라 그를! 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보라! 여기 너희의 죄가 있노라.
여러분의 죄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빌라도가 외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심판을 받길 바랍니다. 그럼 주님과 함께 화해되고 영원한 축복을 받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안 되니까, 참된 모습을 모르니까 6절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대인입니까 빌라도입니까?
혹은 예수를 볼 때 내 죄가 보이고 탄식이 나오는 자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오늘 이 대목에서 우리의 죄성을 보는 발견해낼 수 있는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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