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는서재

고백하는 서재

요한복음 주일강해설교 19장 1-16절(설립7주년)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19-10-27 20:06
조회
126


요한복음 주일강해설교 19장 1-16절

오늘은 교회가 설립된지 7주년 된 날입니다.
시작한 것은 알다시피 부산 수영구 무학로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작년 12월 첫 주에 옮겨와서 예배를 새롭게 드리게 되었지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우리 교회의 시작은 무엇보다 최하임 목사님의 뜻이 있었고, 부군인 심동윤 집사님의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 땅에 좋은 뜻을 펼치기 위한 뜻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줄 또한 믿습니다.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7살이 되는 이쯤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고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교회를 세운다”
이 문장은 성경에 딱 한 번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죠.
교회가 목적어가 되고 세우다는 동사가 되어 ‘교회를 세우다’ 라고 합니다.
세우다라는 동사를 우리가 찾아보면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오란 말인데 이 단어는 오이코스라는,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도메오라는 말은 세우다. 즉 집을 세우다라는 뜻으로, 이 두 단어가 합성어가 되어 교회를 세우다 할 때의 세우다가 되었습니다.
즉 단어로만 보면 집을 세우는 것과 똑같은 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 재밌는 건, 이 동사가 건물을 세운다고 하는 의미로는 한 번도 사용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트리니티빌딩이나, 혹은 십자가를 세운다는 의미로는 전혀 안 쓰였다는 거죠.
가정을 세운다 할 때 우리는 좋은 주택을 세우는 걸 생각하나요?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잘 양육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이것이 바로 오이코도메오.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빌라건 아파트건, 그런걸 세우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적어도 성경에선 건물을 건축하는 걸 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가정, 부부, 자녀를 세우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부산고백교회는 건물보다도 우리가 잘 세워져 왔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교회에 와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세워왔는지.
끝없이 자기자랑을 하고 자기를 세우면 그건 세우는 게 아니겠지요.
우리 교회가 처음 세워질 당시의 도로명, 무학로였지요. 단어를 한 번 찾아봤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고 나오진 않지만, 두 경우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춤출 무에 학 학을 쓰거나, 혹은 무학대사를 말할때의 없을 무에 학문 학.
둘 모두 상당히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춤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학은 아주 좋은 의미죠. 또 무학대사는 학문이 없다고 하는, 스스로를 낮추는 겸비의 단어입니다.
그런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건 좋은 의미가 있겠죠.
우리는 그 의미에 합당한 교회를 세워왔나요?
교회를 세운다 할 때 세우는 것은 누가 세웁니까?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은 목사가 자꾸 자기 이름을 세우려 합니다. 이름을 내세우려 하지요.
교회를 세운다 할 때 성경에는 오직 1인칭 동사만 나옵니다. “내가 세우리라” 바로 예수 이십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예수가 세우는 겁니다.
좋은 교회 큰 교회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움은 예수가 하시는 거죠.
그러니 작아도 아멘 하고 만족하고, 크면 큰대로 만족하고. 그것이 예수가 원하는 교회 아닐까요?
우리는 욕심이 생기니 자꾸 큰 교회를 바라고 십자가를 높이 세우려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옥상에 십자가를 안 세운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에 단기선교를 이번에 다녀왔는데, 그곳도 십자가가 무척이나 작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보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주님은 살아 역사하십니다. 성공 가운데가 아니라요.
그럼 그러한 예수의 교회를 어떻게 세우는 것일까요?
교회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 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당신께서 세우실 때, 에크 칼레오. 그렇게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불러냄을 받음 사람. 그게 우리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그래서 내가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밖으로 나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게 우리 자신의 고유성이고요.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모아다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부름 받아서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인지, 여전히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요.
세상 밖으로 나온사람은 어찌합니까? 마16장 안에서,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이 내 인생의 주입니다.” 하니까 예수께서는 “내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그 맥락 안에서 내가 세상으로부터 나온 사람인지, 교회 백성인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가 참된 주다, 그리스도다 하는 것. 여러분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가 고백이 되십니까?
그럼 여러분은 교회 사람입니다. 밖으로 부름 받은 사람, 세상 밖의 사람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고백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가운데 서 있는 겁니다.
여러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 큐리오스란 말은 주인이란 뜻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다 하는 고백이지요.
그런데 내 인생의 주인은 사실 나 자신 아닌가요? 그러니 자꾸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대로 살려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방식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한 마음으로 우리는 부산고백교회를 세운 겁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서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이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원해서 편한 길 마다하고 이곳에서 작은 목회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하는 것이 삶을 통해 고백되지 않으면 곤란한 것입니다.
이게 쉽지만 어려운 일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그래도 나지. 예수를 믿긴 믿어도..’ 그게 우리의 연약한 모습 아닌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7절에 “그 법대로 하면..” 이란 말이 나옵니다.
19장 1-5까지 지난 주에 읽었지요?
빌라도는 예수를 안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에게 죄가 없어서. 그러니 유대인이 하는 말이 법대로 하자! 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아닌지 우리가 한번 해보자! 이게 7절의 내용입니다.
기억 나십니까?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재판장, 유대인의 심판 속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러던 것이 빌라도 앞에 와서야 이렇게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법대로 하자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결코 모세율법이 아닙니다. 유대 자신이 만들어낸 법이지요.
우리니라가 요즘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나 정치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법대로 살고, 각자가 다 법만을 주장합니다.
우리도 속에는 어딘가 한 편으로 기울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을 살리는 길이라고 모두가 이야기 하죠.
바울은 이전에는 법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죽이길 거리낌 없었죠.
거기서 인생의 만족을 누렸고요.
법에 얽매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얽매면 다 그런 겁니다.
그러나 우린 아니잖아요. 세상 밖으로 불려진 사람은 이데올로기가, 세상의 법대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갈라디아서에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대해 살기 위해서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온통 세상 원리대로 산다고 하니 그게 문제인 겁니다.
저는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교회 크니까 목사들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해집니다. 일본에서조차 요즘 이슈인 한국 대형교회들 이야기를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크니까 이권이 생기는 거에요. 그 틈에 예수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라도 부디 세상의 원리를 버리길 소망합니다. 우린 예수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법에 의하면 그렇다!”(그러니 예수를 죽여라) 하니 처음으로 빌라도가 두려워 합니다.
빌라도는 왜 두려워했을까요?
유대인의 법대로 하다 소동 일어나면 목 떨어질까봐서요.
지금까지는 빌라도는 그래도 양심이 살아있었습니다.
죄가 예수에게는 찾을 수 없다고 해왔습니다. 그런데 세상 법대로 하겠다 하니 빌라도가 덜컥 겁이 난 겁니다.
두려워하다는 말은 뒷걸음질 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서 뒷걸음질 치는 것 말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부산고백교회가 세상 원리대로 따라가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자리에서 설교를 합니다.
이땅이 어찌되건 십자가가 어찌되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영혼 하나 하나가 주님과 어떻게 교제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 아닐까요?
세상사람들은 양심보다 세상의 법을 따릅니다.
광화문에 사람이 많으면 그리로, 서초동에서 그러면 그리로. 바람이 부는대로.
예수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초월해 살았어요.
우리가 그럴 순 없지만, 그렇게 살고자 하는 교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자신의 이익을 좇아 살게되면 어떤 소리를 내게 되느냐 하면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소리지릅니다. 소리지른다는 말은 원문에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말합니다.
사람이 집단적 이익을추구할 때 그 모습은 동물과도 같아집니다.
예수를 죽이라는 말은 그렇게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는 겁니다.
우리 부산고백교회 성도들이 모여 울부짖는 소리가 짐승의 소리로, 탐욕스러운 소리로 들리면 어떻겠습니까?
우린 그런 신앙을 좇으면 안 됩니다.
동물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살아가는,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해주고, 위해주고, 못해도 잘 했다고 해주고, 칭찬해주고.
이게 어려운 이유는 내가 옳아서 그런 겁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보다는 그를 넘어 참된 자유, 진리를 좇아가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이 원하는 뜻이에요.
부산고백교회가 걸어가는 길이 이런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린 에클레시아, 부름 받아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니까.
세상의 원리가 아닌 예수의 원리, 성경의 원리. 이런 식으로 여러분의 삶을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누리의 성공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셨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런 신학은 성경에 비추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앞두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나를 건져주세요 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내가 고통당하는 중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자꾸 높은 십자가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는 거에요.
세상 가운데서 1등하게 해주는 것, 그게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고통당하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제일 중요한 건 고통 중에서 나를 건져내심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나와 함께 설움받고 계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기독교의 첫 걸음입니다.
나는 왜 성공 못해? 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왔다면 가만히 떨쳐버리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응답은 명료합니다. “내가 함께 있다”
실패하는 가운데 여러분과 함께 실패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여러분의 인생을 걸어가십시오.
그 가운데 여러분의 행동이 바뀌고, 세상에 있지만 세상 밖에 있구나 고백이 터져 나오면서, 여러분 삶의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런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전체 21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21
New 요한복음 주일강해설교 19장 28-30절 “다 이루었다”
confessing | 2019.12.08 |
confessing 2019.12.08
20
요한복음 주일강해설교 19장 23-27절 “자기 집에 모시니라”
confessing | 2019.12.01 |
confessing 2019.12.01
19
주일구약강해설교 사무엘상 1장 1-8절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
confessing | 2019.11.17 |
confessing 2019.11.17
18
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 19장 17-22절
confessing | 2019.11.10 |
confessing 2019.11.10
17
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 19장 8-16절
confessing | 2019.11.03 |
confessing 2019.11.03
16
요한복음 주일강해설교 19장 1-16절(설립7주년)
confessing | 2019.10.27 |
confessing 2019.10.27
15
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 19장 1-6절
confessing | 2019.10.13 |
confessing 2019.10.13
14
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 18장 33-40절
confessing | 2019.10.06 |
confessing 2019.10.06
13
요한복음주일강해설교 18장 28-32절
confessing | 2019.09.15 |
confessing 2019.09.15
12
요한복음 주일강해설교 18장19-27절
confessing | 2019.09.14 |
confessing 2019.09.14
Call Now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