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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7절 강해설교 01 "복음적 자기 인식" - 작은 자의 원리

로마서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0-09-20 20:08
조회
264

로마서 1장 1-7절 강해설교(1)

복음적 자기인식 : 작은 자의 원리

김산덕 목사

이제, 약 5년에 걸친 요한복음 강해를 마치고, 이어서 로마서를 한 절 한 절 아주 깊이있게 공부하며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는 교회 역사의 굽이치는 길목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여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중세의 종언을 고하면서, 새로운 종교적 개혁 운동을 일으켰던 종교개혁의 동기를 찾는다면, 그것은 로마서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6세기 당시, “이 로마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복음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책”이라고 마르틴 루터는 일갈했습니다. 또한 개혁파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편지는 성경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문을 여는 것과 같다.”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책을 썼다고 하는 루터파 신학자 멜랑히톤은 로마서가 “기독교 신학을 총괄하는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정통신학을 새롭게 재구축하였던 것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가 가지는 질문은 바울의 질문이며, 바울의 대답은 우리의 대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힘찬 음성은 내게 새로웠고 지금도 새로우며, 그 음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틀림없이 새롭게 다가 갈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서는 신학과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에 따라서, 신학자에 따라서 다양한 접근과 해석이 존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부산고백교회는 가능한 이러한 선배들의 해석을 참고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로마서를 통해서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시기적으로 약 56-57년경, 제3차 전도여행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여, 약 3개월을 머물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약 1년 반을 머물면서 기도와 눈물로 세운 교회 입니다. 이곳에 머물면서 바울은 다음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 보면서 기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9절, 23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지중해 동부 연안을 중심으로, 오늘날 마케도니야 지방인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아주 편만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며 세웠다고 술회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전도할 곳이 없을 정도로, 바울은 각 지역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내용을 보시면, 이렇습니다.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전부터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확한 날자는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바울은 이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 선교가 끝나면, 반드시 ‘서바나’ 오늘날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기도하며 준비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3차 전도여행이 끝나는 즈음에,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고자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교회 사람들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면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스페인으로 파송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15장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간 너희들과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고 합니다. 새번역, “여러분들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먼저 방문하여 그들과 영적으로 깊은 기쁨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서로가 선교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진다면, 로마 교회가 바울을 스페인 선교사로 파송하는 파송 교회가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남은 여생을 끝까지 선교에 투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 선교를 위한 전초 기지로 로마 교회를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 만큼 로마 교회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로마 교회는 그렇게 해 줄 것이라는 신뢰와 기대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회에서 로마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써내려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써 내려갔던 정황은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바울의 선교적 비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의 밑바탕을 깊이 흐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선교” 또는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복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 선교적 관점에서 이해

로마서는 바울이 자신의 복음이해를 아주 정갈하게 차려놓은 신학적 밥상과도 같습니다. 유대주의나 종교적 광신주의 등과 같은 내부의 적들에 대하여 논증적으로 기술하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그 당시 ‘티아토리베’라는 문답형식으로 복음을 증언하기도 합니다. 복음과 율법, 또는 하나님의 역사에 등장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기독교인들과의 문제 등과 같은, 실로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음 근간에 관계되는 주제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써내려간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16장을 제외하고 “교회”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 즉 전도와 선교하는 현장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적어 놓은 책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르트가 제2판 서문에서 말하듯이 로마서 내용은 “온전한 복음이라기보다, 실제적 복음이 주로 기록된” 책입니다. 복음을 실제적(실천적)으로 파악하지 않고는 결단코 온전한 복음에 이를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는 실천적이며, 선교적인 것입니다.

비록, 로마서는 유구한 교회 역사 가운데서 교의학적 또는, 조직신학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그것은 복음선교라는 케리그마 그 자체입니다. 로마서는 바울 자신이 선교현장에서 경험한 실제적인 간증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도 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또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복음에 나타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1:16-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는 의에 이르러,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삶의 이야기가 강조되는 책입니다. 상아탑에 갇혀있는 신학, 머리속에만 머무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는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온전한 것입니다. 갈리디아서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천적 현장이 적혀있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 현장에서 믿음의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바울은 자신을 1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이 문장을 원어 순으로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 종, 그리스도 예수의, 부름받은 사도, 택함을 받은, 복음을 위하여.”(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κλητὸς ἀπόστολος ἀφωρισμένος 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

제가 이렇게 순서를 강조하는 것은 이 한 절 안에 바울이 실천적 현장에서 자신이 어떤 자기 인식으로 전도하며 선교하였는지, 그 확신과 겸손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문두에 나오는 “바울” 즉 ‘파우로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써 내려가면서 자기 이름을 가장 먼저 써놓고 있습니다. 사실,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록한 13개의 모든 서신서는 ‘파우로스’(바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파우로스’(바울)로 시작하지 않는 서신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형식이 그 당시 헬라 로마식 편지 형식을 차용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간단히 정리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자신의 13개 모든 서신서를 “파우로스”라는 자신의 로마식 이름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은 오늘날 그 서신서를 읽어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가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추측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는 사울이었지만,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바울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이라는 이름만 사용했다고 하면서,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의미를 가졌고 해석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극히 자의적 해석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9장) 이후에도 사울이라는 이름은 13장까지 사용하였으며, 또한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지지만, 사울이란 뜻은 “큰 자”가 아니라, “구하다”라는 것입니다. 여하튼, 다메섹 회심을 기준으로 이름 사용법을 나눈다던지, 또는 의미적으로 구분한다던지 하는 이분법적 해석에는 우리가 손을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사도 바울은 사울과 바울이라는 두 이름을 겸용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김산덕이지만, 일본에 가면 때로 ‘카네야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식 이름으로는 사울이라 부르고, 헬라 로마제국이라는 선교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전도할 때에는, 헬라 로마식 이름이었던 ‘파우로스’(바울)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왜 ‘파우로스’라는 이름을 모든 서신서 초두에 선포하듯이 기록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기 위해서 사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성경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사울”이란 뜻은 하나님께 구하였다. 즉,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도 ‘머리 하나 더 큰’ 아주 헌칠한 키에 외모까지 준수한 꽃 미남의 왕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잘 생기고 그리고 전쟁도 잘하며, 권력까지 가졌다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아주 큰 재산이며,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베냐민 족속들은 분명 ‘사울’을 큰 자랑거리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는 사사시대의 에훗, 또는 에스더에 나오는 모르드개 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부모님은 베냐민 지파의 위대한 조상들의 반열에 자기 아들 사울이 들어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여, 외모지상주의, 학력주의, 엘리트주의, 성공주의와 같은 세속화된 원리를 가지고 자녀를 키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 아래서 자란 사울이었기에, 그는 말합니다. 나는 베냐민 지파로서, 팔일 만에 할례받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키웠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빌3:5)이라고 말입니다. 초 엘리트로 성장했던 사울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울은 이러한 성공주의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 왔슴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내 동족 중 여러 사람들보다 유대교를 도가 지나치게 믿었고,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는 더욱 열심히 있었다.”(갈1:14)고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을 보시면, 모든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가는 일등주의, 성공주의, 그리고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사울의 모습을 엿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선교 현장에서, 그러한 권력주의, 성공주의, 물질주의, 성과주의 등과 같은 세상적 원리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선교 현장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복음의 능력만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교 현장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을 ‘파우로스’라고 선포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파우로스’, 나는 작은 자 입니다. 작은 사람, 한 줌도 안되는, 시시하고 하찮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구원하기에, 복음 안에서는 나는 ‘작은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작은 자” 원리는 실로, 창세기부터 등장하는 성경을 관통하는 성경적 원리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이사야 선지자는 “작은 자가 천명을 이루겠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이사야 60:22)고 선포합니다. 예수님 역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9:48)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성경을 관통하는 ‘작은 자’ 원리를 선교적 현장에서 체험하고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15:9), 더 나아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엡3:8)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자신의 서선서 13개에 앞에, 한번도 빠트림이 없이, ‘파우로스’라고 이름으로 써내려간 이유는 ‘작은 자’ ‘약한 자’라는 성경적 원리 때문이었습니다. 이 성경적 믿음/원리가 전형적으로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 아니겠습니까? 약한 자로 강하게 하시는 십자가의 원리 앞에, 사도 바울은 “파우로스”라는 이름을 고집하며, 선교현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파우로스’ 이것은 주님, ‘나는 주님 앞에서 한 없이 작은 자” 입니다. 라는 자기 고백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입게 되는 선교현장은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 복음의 능력이 작동하는 장소입니다. 이 작은 자 믿음에 자신을 세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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