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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7절 강해설교 03 "복음적 자기인식" - 바리새적 분리된 자 vs 하나님에 의해 분리된 자

로마서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0-10-11 17:05
조회
86

로마서 1장 1-7절 강해설교(3)

복음적 자기인식 :
바리새적 분리된 자 vs 하나님에 의해 분리된 자

김산덕 목사

바울은 로마서를 써 내려가면서, 그가 선택한 첫번째 단어는 파울로스 였습니다.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 세번째는 “부름받은 사도”, 네번째는 “택정함을 받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선택한 문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장 1절을 써 내려간 어순입니다.

우리는 이미 두 번에 걸친 설교에서, 파울로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작은 자, 적은 자, 하찮고 보잘것없다는 뜻을 가진 ‘파울로스’로 시작하면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어갔습니다.

그가 말하는 종이란 내용이 없는 껍질뿐인, 생각이 전혀 없이 무조건 아멘하는 아멘주의자와 같은 굴종적인 그런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에베드적인 의미에서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택함을 받아 그 사명감에 투철한 의미에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생관을 고백했고, 더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삶의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바울은 자신을 세번째로 “부름받은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개역개정은 “사도로 부름을 받아”로 번역하지만, 바울의 어순을 살려서 말하자면 “부름받은 사도”입니다.

“부름받음”이 먼저 나와서 사도를 수식하며, 꾸며줍니다. 사도는 사도인데, 부름을 받은 사도라는 것입니다. 부름 받았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즉 하나님에 부름을 받아서, calling되어서, 소명을 받아서, 사도가 되었다는 뜻을 바울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부름받은(κλητὸς) 사도’라고 증언 한 것은 사도의 유래성, 그 시작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강조하는 자기고백이며 증언입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당신 삶에도, 당신의 일에도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일 깨닫고 확인하는 것은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가는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과 사역의 시발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깨닫고 고백하며 삶의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1:1, 12) 다음과 같이 간증합니다.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배운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성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되고, 유래되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출발점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확신은 세상에서 그 어떤 우겨쌈을 당하여도 분명히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더욱이 이런 바울의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다”(κλητὸς)는 신앙은 아주 성경적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광야 떨기 나무에서 모세 역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전에서 부름을 받았던 이사야가 있으며, 양을 치며 뽕나무 재배자였던 아모스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받은 구약의 부름받은 선지자들의 반열에 자신을 세우며 이해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부름받았다는 것은 특별하게 초대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초빙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란 무엇입니까? 사도란(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 파송하다, 보내다, 파견하다, 또는 “대신하여 보내다”는 뜻을 가진 명사형입니다. 말하자면,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보냄받은 예수의 대리인으로 초빙된 직분입니다.

부름은 보냄으로

하나님의 부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름과 보냄의 이시어티브, 주도권은 바울이나 종교나,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름과 보냄이란, 인간의 능력과 자발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입니다.

부름 받아 보냄 받은 사도는 자신의 영감이나 지혜, 또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천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처세술로 높은 종탑 세우기에 성공한 종교적 영웅도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가는 천상으로부터 파송된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과 사역이 온전히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정되고 속박된 자입니다. 그런 속박 가운데 있을 때에만, 그것은 영광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사도가 될 것이라고 도무지 상상조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됨됨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가 깨닫고 확신한 것은 자신의 삶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정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치, 예레미야의 고백을 경험한 것입니다. “모태에서 창조되기 전에 이미 나를 아신 하나님, 엄마 배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셨던 하나님”(1:5)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써 내려가면서 세번째로 택한 단어는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택정함을 입었다”는 고백은, 바울이 예수를 만난 이후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이 만세전에 택정되었다는 사실을, 물이 땅을 적셔가듯이, 깊게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체험이나 경험, 또는 열광주의적 믿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배후에 모든 것에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택정하심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삶의 우연성을 철저하게 배격했고, 거부했습니다. 적어도, 바울 인생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도록 살아간다고 합니다.” 또한 모든 삶의 행동과 결과에 대하여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고전15:10).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신앙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택정함을 입었다”로 번역된 아포리조(ἀφορίζω)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분리하다, 구별하다, 떼어 놓다는 뜻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왜 이 단어를 선택하였을까요?

여러분, ‘분리’라는 단어를 접하면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바리새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 즉, 파리사이오이, 히브리어로 페루쉼, 분리하다, 격리하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바라새인이란, “분리된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누구에 의해서 분리되었으며, 누구로부터 분리되었습니까? 그들은 인간에 의해서 분리되었으며, 일반 백성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습니다. 인위적으로 분리하고 구분하여,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파 공동체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아주 엄격한 규정이 요구되었습니다. 오랜 시험 기간을 통하여, 정결과 신뢰성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그 후에, 공동체의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회원이 됩니다. 신입 회원이 되면 정결과 십일조 규정들을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했습니다. 또한 자치적 재판권이 있어, 규칙에 미치지 못하면 제명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분리되고 통제되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규칙에 꽁꽁 얽매인 자들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선한 의도로 시작하였다 할지라도, 결국 자기 의를 내세우는 고집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룩한 영적 경건을 전문 직업인 형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성경 지식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유린하고 비방하였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보다도 전통을 중시하며, 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하나님께는 무관심했고, 오히려 이웃들에게는 무자비했습니다. 그들은 거듭난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살았기에 예수님과 부딪혔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리의 정당성과 신뢰성을 하나님이 아니라, 본인들의 규율과 율법이라는 인위적 요소에 두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런 분리된 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택정함을 입었다” 원문대로 번역하자면, 또 다시 “분리된 자”가 되었습니다. 분리된 바리새인에서, 이제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더 분리된 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회 규정과 절차, 의무와 율법 준수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분리(아포리조)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분리된 사람은 모든 사람과도 잘 어울리는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없었던, 분리된 사람 바리새인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분리된 자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동일했습니다. 가난에 처할 줄도, 부한 자에 처할 줄도 아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이 특별한 구분된 존재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종교적 율법이나 행위에 의거해서 분리된 자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분리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분리된 존재였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 그리스도 안으로 분리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분리된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인간의 종교적 굴레와 종교심으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거룩한 종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종교적 열심으로 자신을 남과 구분시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으로 분리된 거룩한 신앙인이 되십시오.

여러분,
바울이 선택한 “택정함을 받다”는 영어로 지평선을 뜻하는 영어 호라이젼(horizon)의 어근과 관계하는 용어 입니다. 여기에는 경계를 두다, 제한을 두다, 범위를 설정하다 는 뜻이 있습니다.
더욱이 이 용어는 4절의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다로 번역된 ‘호리조’ 역시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택정함을 받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 왔다는 뜻입니다. 그 분의 범위 안으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택정함을 받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분리된 자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자 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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