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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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7절 강해설교 04 "하나님의 복음" - 육과 영의 교차점: 삶의 임계상태

로마서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0-11-01 21:44
조회
44

하나님의 복음
육과 영의 교차점 : 삶의 임계상태

김산덕 목사

오늘은 “로마서” 강해 네 번째 시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1장 1절에서 “파울로스”라는 단어로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름을 받고 택정함을 입은,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라는 어순으로 1절을 써내려 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파울로스,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의 부르심, 택정함을 받았다는 이 네 글귀는 모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를 수식하는 형태로 기술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한 없이 작은 파울로스가 된 이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이유, 내가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이유, 그리고 내가 은혜로 분리되고 구분되어 택정함을 받은 이유, 이 모든 이유가 오로지 한 가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었라고 바울은 고백하며 증언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함”이라고 그는 스스럼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존재 이유란 “하나님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방점을 “하나님의 복음”위에 찍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생을 해석하였고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과연 무엇이길래,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그곳에 걸어 놓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분명 교회가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복음도 아닙니다. 잘 나가는 목사들이 말하는 복음도 아닙니다. 그가 목을 맨 것은 오로지 한 가지, “하나님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묵상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그 “의”에 해당하는 흔히 속격(소유격)이라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이니까,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하나님에 대한 기쁜 이야기로 생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것을 목적격적 소유격이라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 하나님이 시작하신 복음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것을 주격적 소유격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생각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의 관한 이야기로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음으로 해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음 vs 다른 복음

사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강조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복음”외에, “다른 복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보다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갈라디아서(1:6,8,9; 고후11:4) 등을 보시면,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아주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그래서 “사도인 우리가 전하지 않은 복음”이 각 교회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둔갑한 가짜 복음(fake gospel)이 난무했다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복음, 진짜 복음인 것처럼 사탕발림을 해서,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다른 복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은 여전히 교회 안에는 존재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77(일흔 일곱)번이나 사용했던 “복음”이란 과연 무엇이길래, 가짜 복음이 등장할 정도였습니까?

‘복음’으로 번역된 헬라 그리스어는 ‘에우앙겔리온’이라는 단어 입니다.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특히, 전쟁의 승리를 알려주는 기쁜 소식을 ‘에우앙겔리온’이라고 했으며, 또한 이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에우앙겔리온’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감사하다고 신들에게 받치는 ‘제물’도 ‘에우앙겔리온’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에우앙겔리온’은 황제를 숭배하는 것과 관련되어, 새 황제가 나타남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는 소식을 ‘에우앙겔리온’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에우앙겔리온’은 사회 군사 종교 정치 분야에서 다양하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 용어로 차용되면서, 교회 안에서도 전쟁과 고난으로부터 심리적인 안녕과 평화, 기분좋은 출세 성공담 무용담 등의 이야기로 둔갑되어 나타났고, 또는 새로운 용기와 힘을 가져다 만담이나, 교양 강좌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세상적 ‘복음’ 이야기, 즉, 들어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많이 널려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 SNS를 보시면, ‘기도 응답을 받는 방법’,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 ‘천국을 보는 방법’ ‘하나님 음성을 듣는 방법’ ‘방언하는 방법’ ‘고난을 이기는 방법’ ‘시시하게 살기엔 너무한 인생’ 등, 인생 매뉴얼과 같은, 살아가는 인생 사용 설명서와 같은 이야기 설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에 약아빠진 사람들은 이런 ‘인생 체세술’이나, 또는 ‘종교적 처방전’, ‘성공하는 방법’ 등의 이야기를 너무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기분좋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진통제나 마약같은 이야기를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생살이의 처방전이나, 또는 성공의 처세술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질병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주격적 소유격

바울은 그런 세상적 복음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어가 되시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그분이 말씀하시고, 그분이 시작하시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만 나오는 복음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있는 복음 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음”은 이 세상이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본 적이 없는, 만져본 적이 없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신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늘 언제나 새롭게 청종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적극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참여 하기를 즉각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올바른 반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가지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에, 천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을 향하여 내려오는, 당신의 삶 속으로 성육하는 사건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성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복음이지만, 이 복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단순히 천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아니 당신의 삶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하나님의 복음, 즉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약속을 통해서 역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역사 속에서 역사화되어 드러낸 자신의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NIV영어번역 성경이나, 일본성서협회에서 번역한 “신공동번역” 등을 보시면 2절에서 6절까지를 ‘줄표’(대쉬, dash)를 넣어 표기해 놓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2절에서 6절까지가 하나님의 복음(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는 의미로, 마치 괄호 묶음을 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을 베푼 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2-4절까지만 원문을 살려서 제가 다시 번역을 하여 읽어 보시면,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 그는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 그리스도의 복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역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참된 의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역사 속으로, 역사의 옷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19절로 가면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을 바꾸어 놓고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그것이 역사 속에 드러난 형체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교차점 : 두 개의 세계

따라서 이 분 안에서 모든 역사가 함께 만나게 됩니다. 이 분 안에서 모든 삶이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 안에는 깊은 만남이 있지만, 동시에 아픔의 헤여짐도 있습니다. 서로 함께 할 수 있지만, 서로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까지도 담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세계”(zwei Welten)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신 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육체적” 세상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란, 하나님의 복음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 입니다.

이 육신적 세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근원적인 창조와 궁극적인 구원으로부터 단절된 세상입니다. 마치, 생명 나무에 화염검을 두었다는 성경적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찾아 오지 않는 이상, 이 육신적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으로부터 단절되고 두절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두 세계가 서로 만나는 지점, 그 교차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4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according to flesh)” 그리고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κατὰ πνεῦμα ἁγιωσύνης: 새번역은 “성령으로” 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 / 공동번역은 “신성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원어는 ἁγιασμός[성화]가 아니라, ἁγιωσύνη[거룩한] 입니다. 따라서 «성결하는 영»이란 양자설 해석 위험까지 미치기 때문에, «성령»으로 번역해야 맞습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천상의 “하나님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세계를 만난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와 성령의 세계가 서로 만난 것입니다. 서로의 양면이 이제 맞닿았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세계가 완전히 육으로 들어와 육화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신비하게 하나의 인격 안에서 존재하는 것 처럼, 신비한 방식으로 육신의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해석과 이해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 동안 육신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 은폐되어 있었던 참된 생명의 세계, 참된 은혜의 세계, 참된 구속의 세계가, 이 교차점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세계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육신의 시간”을 새롭게 해석해야하고, 이해해야 하는 새로운 운명을 맞이 한 것입니다. 육신의 세상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은혜로 육신과 세상를 해석할 수 있는 은혜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세계의 경계면(Bruchstelle: 절단면)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계인가? 저 세계인가?의 귀로에 선 경계인으로서, 임계상태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육신적 삶 속으로 일방적으로 찾아 들어 오셨던 “하나님의 복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육적 세상과 영적 세상이 서로 만나는, 그래서 영적 은혜를 체험하여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그때까지 자기 삶을 육신적으로, 세상의 종교로 인생을 해석하였고 이해하였지만, 그분을 만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적 원리에 의해서 이해되고, 해석되고 관찰되어지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듯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처럼 육신에 살면서 천상의 하나님의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될 수 없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의 말처럼, 은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될 때만 그것이 은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육신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육신적으로만” 당신의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당신의 삶과 존재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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