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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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장 10-21절 강해설교 07 "하나님 말씀 시대의 도래"

사무엘상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0-11-15 15:59
조회
23

하나님 말씀 시대의 도래

김산덕 목사

오늘은 지난 설교에 이어서, 3장 10-21절을 살펴 보고, 함께 은혜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사무엘상을 기록한 저자가 사무엘상 3장을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희귀 : 그러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1-2절을 보시면, 하나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으므로, 세상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희귀한 시대, 즉 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시장화되어, 상품화된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왜곡되고, 편집되어가는 시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확인했습니다. 소비자 입맛에 맞는 상품성 말씀은 풍성했지만, 진정한 하나님 말씀은 희귀했던 것입니다. 입맛에 맞아 점점 몸짓은 커갔지만, 그런 영혼은 점점 어두워져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점점 어두워가는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당신의 빛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꺼져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등불이 어떻게 새롭게 활활 다시 타오르게 되는지, 어떻게 새롭게 빛을 비추어 가는지, 이제 저자는 10절 이하에서 설명하여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여호와의 전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지금 여호와의 전에는 사무엘이라는 소년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보금자리로 삼고, 그 안에 인생의 보따리를 풀어 놓고 살아가는 사무엘이었습니다. 마치,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이 다시 활활 타오를 것을 기대하듯이 그는 여호와 전에 몸을 붙이고 살았습니다.

그런 사무엘을 여호와께서 부르시기 시작합니다. 한 두번이 아닙니다. 네 번이나 부릅니다. “부르다”(카라, קָרָא)로 번역된 동사는 마치 불러서 꽉 붙들겠다는 뜻을 가집니다. 주님은 사무엘을 부르시고, 그를 붙들어 그를 세워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번을 불러도 사무엘이 알아차리지 못하니, 네번째는 조금 달리 하십니다. 네번째는 여호와께서 직접 “임하여 서서” 그를 부르십니다. 즉, 직접 찾아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오셔서 사무엘 앞에 서서 그를 붙드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였다”(보, בּוֹא, to come in)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실, 이것은 그냥 옆에 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오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삶 속으로 직접 개입하셔서, 들어와서, 그를 붙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를 꽉 붙잡아, 이제 새로운 시대의 사역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호와께서 네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실때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두번에 걸쳐서 이름을 부르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처럼 거듭 부르는 장면을 우리는 가끔씩 목격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 말씀 앞에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가 외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 때, 주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두 번에 걸쳐서 이름을 부릅니다(창22:11). 아브라함에 대한 주님의 신뢰, 사랑이 드러납니다.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야곱아, 야곱아”(창46:2)라고 부르셨습니다.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모세야 모세야”(출3:4)라고 이름을 두번 부르십니다. 두 번 부르는 행위는 그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애틋함이 담겨져 있는 모습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행보가 여기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사무엘이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쇼메아).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듣겠다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적 의미(샤마)는 듣는 행동과 순종하는 행동을 함께 지닌 동사입니다. 주의 깊게 듣고, 그렇게 실제로 그렇게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들어와 내 영혼을 감흥시키고,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의지로 삶의 바꿈을 결단하는 실천까지 내포하는 것이 ‘샤마’ 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에게 듣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청취 행위가 아니라, 듣고 그대로 행하는 순종/청종하는 실천적 행위입니다. 사무엘의 이름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사무엘의 삶은 순종을 실천하였던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성격적 원리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말씀 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준행하지 않는 자는 모레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며 순종하는 것은 실천적 믿음은 반석위에 집을 세워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곳에다 인생 집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마음 아픈 것은 사무엘이 말했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는 사무엘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엘리가 사무엘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다시 부르거든 이렇게 대답해라! 고 하면서,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는 하나님 말씀에 경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 이야기가 아닙니까?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습니다.”를 알고 있었던 엘리 였지만, 결국 그는 듣고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래위에 인생의 집을 지은 것입니다.

사무엘이 듣게 될 내용이 ‘자기 가족의 멸망 이야기’라는 사실도 모른체, 엘리는 사무엘에게 주여 듣겠습니다.를 말하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하여 심판을 받게되는 아주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왜 엘리 가족이 주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였는가? 그 내용이 12-14절에 나오지만, 보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13절 입니다. 개역성경은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하나님을 저주하였음에도 그들을 꾸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들의 죄란 무엇입니까? 2장 12절, “행실이 나쁜 여호와를 알지 못한” 아들입니다. 17절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더라.” 즉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멸시하다”로 번역된 ‘나아츠’(נָאַץ)는 시편 74:18절에는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다.”로 번역되어 등장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깔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업신여기다, 얕보다, 깔보다, 무시하다, 경시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예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피곤하니까, 바쁘니까, 갈데가 있으니까, 오늘 약속이 있으니까, 친구 만나야 되니까, 일해야 되니까, 이런 모든 이유는 예배가 경시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항상 뒷전입니다. 예배를 경시하는 것이 왜 저주를 부릅니까?

여러분, 하나님 예배를 경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하나님을 욕보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예배란 그분의 임재와 실제적 역사하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말씀의 사건으로 우리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예배와 말씀을 강조하는 부산고백교회입니다. 일곱 날마다 돌아오는 이 날, 내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을 판단하는 기준점, 내 삶의 가늠자가 예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주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 즉 예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저주를 자청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하심을 가볍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자신에게 저주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예배를 멸시하지 마십시오. 사람들도 자기를 무시하면 가장 기분 나빠합니다. 하나님 예배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11시에 예배로 부르시는 말씀에, 자신을 먼저 세우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하나님 예배를 경히 여기고 멸시하는 아들들을 아버지가 철저하게 꾸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장 24-5절을 보시면, 엘리가 분명 아들들에게 충고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엘리가 꾸짖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자식에 관하여는 한 없이 관대해지는 부모를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탓합니다. 그것도 예배 문제만큼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신앙 문제에 관하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엄격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의무를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네 자식을 징계하라.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요즘은 자식들이 아주 똑똑합니다. 젊은이들이 지식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자식들과 말하면, 부모들이 못 따라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매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징계하여야 하며, 꾸짖음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똑똑하고 지식이 많다 할지라도, 부모가 가진 마음과 지혜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이런 허들, 장애물을 우리는 성령으로 극복하면 좋겠습니다.

사무엘의 모습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는 15절에 보니까, 아침까지 누웠다고 합니다. 자기 스승에 관한 저주의 이야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사무엘은 아마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밤을 지새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그런 뜻이 숨어 있지 않나 생각하여 봅니다. 남에게 바른 말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사무엘이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다.”고 증언합니다. 저자가 여기서 “문을 열었다”고 표현한 것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새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열다”로 번역된 ‘파타흐’(פָתַח)가 처음으로 성경에서 사용된 곳은 홍수 심판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창세기 7장 11절에서 “그 날에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씻어 내시고, 새롭게 하시고자 하시는 ‘파타흐’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롭게 여호와의 전에 빛이 비추어지며,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엘리가 사무엘에게 말씀을 묻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17절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던 자가 이제 말씀을 선포하여 알려주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무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엘리라는 한 인간과 그 가족에게는 비극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단에서부터 브엘셀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이제 새로운 말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 가정이 보여 주었던 예배 경시 풍조, 예배 멸시 풍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만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참된 예배자가 될 때, 말씀의 순종이 일어나고, 새로운 삶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번 한 주간도, 새로운 시대가 열려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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