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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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3-17절 강해설교 09 "복음의 빚쟁이"

로마서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1-02-07 17:55
조회
67

복음의 빚쟁이

김산덕

바울은 고린도 근처 겐그레아라는 지방에서, 로마에 편지를 써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로마를 너무나 방문하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습니다. 13절에 나와 있듯이 “여러 번 가고자 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길이 막혔던 것입니다. 왜 무슨 이유로 길이 막혔는지,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지만, 바울은 로마를 갈 수 없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데살로니가 전서에도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는(2:18)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분명하게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설명 하지 않습니다. 그냥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막혁기 때문에, 10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 나아갈 좋은 길을” 구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길이 막혀 갈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언젠가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분명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행하여 보지만,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믿음의 혹독한 시험을 치러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는 남들은 다 잘 되는 것 같은데, 나만 잘 안되는 것 같고, 나만 실패한 것 같고, 나만 초라한 것 같은 좌절감에 비틀거리며, 일어 설 수 없을 만큼 심연으로 빠져 들때가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그래서 그들이 부담스럽고, 그래서 스스로 비관적 감정의 츠나미에 함몰되듯이 땅끝으로 끄져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로, 노력으로도 안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바울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왜 안될까? 왜 매번 가로 막힐까? 그런데 여러분, 바울은 “여러 번 시도하였다(프로티테마이, προτίθεμαι)”를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공동번역은 “계획하였다”고 번역합니다. 프로+티테미: 저 멀리 앞에 세우다. 시도하다, 계획하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성경에 3번 등장하지만, 모두 바울이 사용한 용어로, 나머지 두번은 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번은 모두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다, 섭리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롬3;25, 엡1:9). 다시 말해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기가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는 뉘앙스가 녹아 배어있는 것입니다. 실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섭리, 계획, 작정 등을 의미하는 단어의 뿌리가 되는 동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길이 막혔다”는 수동태 표현을 통해서, 바울은 비록 자신은 로마로 갈려고 몇번이고 계획을 세우고 시도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한 것입니다.

기도와 예배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때로는 계획했던대로 잘 되지 않아, 마음 아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다시 되 묻는 시간을 가지시길 권면합니다. 무조건 밀어 붙이는, 그래서 열심이 특심이 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내가 기도와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때가, 또는 방법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잠시 멈추어 기도의 골방에서 대화를 나누어 보시길 바랍니다. 분명,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주님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왜 가고 싶어했는가? 복음의 빚진 자

여하튼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고 싶어 하였던 이유는 12절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피차 안위함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것을 본문 14절에서는 다르게 표현합니다. 내가 빚진 자라!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 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공동번역인 “문명인이나, 미개인이나, 또는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똑같이”로 번역합니다. 휠씬 의미적으로 본 뜻에 가까운 번역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라는 자기인식

많은 분들이 설교 제목이나, 경건 서적의 제목으로 사용하는 “복음의 빚진 자”라는 아주 유명한 글귀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아름다운 증언이다, 표현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라는 자기 인식이란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기본태가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이렇게 좋은 고백을 바울은 어떤 마음으로 사용했을까? 이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일까? 참 궁금하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알 것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 정말 깊고 찐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하여 봅시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복음이란 무엇인가?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아주 심플하게 어휘적으로만 설명한다면, good news 좋은 소식입니다. 들어서 기분이 좋은 말, 이야기 입니다. 들었을 때 마음이 흥분되고 설레이는 이야기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들었을 때, 가장 기분 좋은 이야기, 소식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아마도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해!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 더욱이 당신을 위해서 한 목숨 아깝지도 않아. 죽을 수도 있어! 라고 누군가가 진실되게 고백한다면, 아마 최고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로마서 5장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아주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너를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를 바울은 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과 성령 하나님의 증언과 조명으로 그 사랑으로 영혼으로 경험하고 삶으로 담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까지 자기를 사랑하여 주신 예수님에 대하여 한없는 고마움과 감사를 느끼며, 그 사랑에 빚진 자로 자기인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사랑이다: 사랑에 빚진 자

그래서 바울의 복음 이해는 그의 사랑 이해와 동일선상에서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을 졌다고 말하면서, 13장 8절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복음의 빚졌다는 것은 사랑의 빚졌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당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에는 항상 빚이라는 성질이 녹아 깊이 배어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너무 행복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 기분은 동시에 나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잘 해주고 싶어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마치 사랑의 빚진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과 사랑은 철저하게 ‘서로성’을 지닙니다. 단독적이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적이지 않습니다.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서로” “피차”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서로”로 번역되는 ‘알레론’(ἀλλήλων)은 성경에 실로 자주 등장하는 말로서, 복음과 사랑의 ‘서로성(性)’을 강조하는 어휘입니다. 만약, “서로”에 방점을 찍지 않은 사랑이라면, 그것은 자기이념을 사랑하는 자기 고집이며 자기애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가지는 사랑의 일방성은 ‘피차성’이 서로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서로, 피차라는 용어는 성경의 독특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로, 119번이나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서로 우애하라,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로12:10).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롬12:16), 서로 지체가 되라(12:5), 서로 비판하지 말라(롬14;13), 서로 덕을 세우라(롬14:19) 서로 위로하라(갈5;15),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7:5), 서로 통용하라(행2:44),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서로 친절하고, 서로 용서하라(요13:34)., 서로 대접하라(벧전4:9), 서로 투기하지 말라(갈5:26), 서로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히10:24), “서로 기도하라”(야5:16).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의 빚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빚을 갚아야 겠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의 빚,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살 때 의가 나타난다.

16절에서, 바울은 복음이란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즉, 복음이 가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의로운 것”이 되며, 그것이 바로 빚을 갚는 것이라는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가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고,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복음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의롭게 사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빚 갚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 그래서 복음의 빚을 갚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 전형적인 예가 요셉입니다. 마태복음 처음 부분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의”란 이런 것이야! 라고 가르치듯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장18절 이하에 나오는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한 번 봅시다. 요셉과 마리아는 서로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동거하기 전에 애기를 가졌습니다. 물론,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요셉은 그것을 알길이 없었습니다.

혼전 임신은 여성을 돌로 쳐 죽이는 게 율법이었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입니다. 여하튼 요셉 본인은 아주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혼전 임신이라는 것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화도 날 것이고, 그 당시 유대 사회의 법대로 처리하려고도 분명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19절에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구경거리로 드러낸다, 데이그마티조 [δειγματίζω]골2:15), 가만히도 부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헤롯이 마술사들을 슬쩍 부를 때 사용된 (마2:7) 것입니다.

생각해 볼 때, “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단어들이 지금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의”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마리아가 잘 못했는데 슬쩍 넘어갈려고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의라고 합니다. 마리아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란, 이웃을 살리는 것입니다. 너무 진영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흑아니면 백으로, 아주 정죄하여 버립니다. 한국 사회가 무서운 사회입니다.

마리아를 율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자 하였던 것” 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로운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생명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도 주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부여 받았는데, 그 빚을 갚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성 입니다. 이웃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것이 의로움이며, 그것이 빚 갚는 행동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살리십시오. 살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미움이나 증오를 사랑으로 녹여, 그 사람을 품어 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그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한다. “다 이루었느니라’의 헬라어 원문은 ‘플레로오’(πληρόω)의 완료형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완성하다’ 입니다. 그래서 “의” 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품고, 초월하고, 완성하여 가는 빚 갚음 행위입니다. 그 완성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빚 갚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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