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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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6-17절 강해설교 10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1-02-15 09:50
조회
90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김산덕

말씀에 들어가기에 앞서, 16-17절 말씀의 구조를 먼저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16-7절은 15절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세 개의 이유 접속사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왜냐하면

첫번째 이유는
Οὐ γὰρ(왜냐하면) ἐπαισχύνο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왜냐하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16절).
For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두번째 이유는
δύναμις γὰρ(왜냐하면) θεοῦ ἐστιν εἰς σωτηρίαν παντὶ τῷ πιστεύοντι,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6절)
for it is the power of God for salvation to everyone who believes

세번째 이유는
δικαιοσύνη γὰρ(왜냐하면) θεοῦ ἐν αὐτῷ ἀποκαλύπτεται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17절).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네번째 이유
Ἀποκαλύπτεται γὰρ(왜냐하면) ὀργὴ θεοῦ ἀπ' οὐρανοῦ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18절).
For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지난 시간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16-17절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도록 행하게 능력이 다름아닌 복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살리는 능력”이라고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마치, 요셉이 의롭기 때문에 마리아가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그녀를 살리려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 “의로움”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단어들이 사용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우리가 생각하기에 부적절한 단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이 생각의 전환, 가치관의 전환, 세계관의 전환을 가능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닐까요.

바울에게,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인식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담아 두는 그런 마음적인 문제가 아니며, 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생명을 살리는 적극적으로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행동 그 자체입니다.

살리는 것 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부끄럽다”는 말은 성경에서 주로 말씀과 관계되어 사용됩니다. 마가복음 8:38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내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나도 너를 마지막 날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서에 네 번 등장하는데, 이런 의미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 그 자체는 살리는 구원적 행위이기 때문에 전혀 부끄러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나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아주 강한 어조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거추장스럽고 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살리는 능력으로 복음은 좋은데, 그 방식에 있어, 예수 방식이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식의 살리기 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세상에서 통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가롯 유다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복음이란 정치적 혁명, 정치저 자유와 해방입니다. 민중의 해방입니다. 이런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응집력을 가지는 지도력과 군사력, 사상과 이념 등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단 한번의 반항도 없는, 거부도 없는, 그냥 맥없이 잡혀 끌려가는 그래서 심문당하고, 조롱당하는, 십자가에 책형을 당하는,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설의 고향같은 이야기른 하는, 세상에서 가장 나약해 빠진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정치 혁명적이며 권력적으로 생각하는 가롯 유다에게 복음은 예수가 바라보는 복음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 시대에는 어떠 합니까? 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전1:23)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복음은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스칸다론’ 스캔들, 안 일어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걸려 넘어지기 떄문입니다. 함정, 장애물, 올무이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분명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율법 행위를 강조합니다. 시쳇말로 종교생활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 자기 희생을 말합니다. 율법 행위, 종교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이라고 말하니,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스캔들, 걸려 넘어지는 올무와 같았던 것입니다. 종교 유대교와 십자가의 사랑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미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련한(모리아) 것 바보스런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헬라인을 말합니다. 헬라인들이란 지식층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인문학을 공부하고, 인문학이 제일 중요하다고 외쳐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우둔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을 일종의 인문학으로 생각하는 그런 착각이나 오해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학이 인문학으로 와해되어 버리고 대체되어 버린 것을 자유주의신학이라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신학적 타당성을 제시할 수 있는 신학입니다.

신학은 인문학적 요소를 가지지만, 그 지향점이 다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인문학은 인간을 향한 것입니다. 인문학적 주장을 하는 이방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모리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도,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 어떤 선함도 없으며, 자랑거리도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극단적 소극주의와 부정주의적 인식은 지식층 사람들에게는 심히 불편한 것입니다. 미련한 울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중심의 강인함을 추구하는 헬라적 문화의 틀 안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인간을 무한히 긍정하고, 인간의 능력에 방점을 찍고, 인간의 정신을 중요시하는 인문학의 기본과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음으로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전설적인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는, 괭과리와 같은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인문학의 시초인 헬라인들입니다.

복음을 정치 경제적으로 생각한 가롯 유다, 복음을 오로지 종교적으로 생각한 유대인, 복음을 인문 철학적으로 생각한 헬라인, 그들에게 복음은 무가치한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과,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사람을 살리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을 살리는 방식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능력만으로는 뭔가 1%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낄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것에 대하여 자신감, 확신감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장애가 있는 사람을 싫어하고 함께하는 것을 몸 마땅하게 여겼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쩌다 보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을 싫어했는데, 본인이 정작 그런 사람을 사랑하다보니, 장애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마. 난 그래도 이런 사람이 좋아 사랑해. 사랑하면 가치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뀝니다. 그 사람 안에 자기가 녹아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신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가졌더라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자신이 녹아져 복음과 일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경험하여 완전히 실뢰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에, 내 삶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살리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선동의 힘이 필요하고, 종교적인 행위가 필요하고, 인문학적인 중심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경제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현대 교회를 보십시오. 세상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성장을 바랍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는 복음설교와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들을 교회가 너무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학과 심리학을 가미한 “교회 성장학”이란 책까지 발간합니다. “기도 응답받는 법” 이런 류의 책이 왜 팔리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런 생각들이 바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복음 + 인간 능력이라는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을까요? “교회의 시장화”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시장화란 무엇입니까? 팔도 시장에 가면 여러 가게가 자기들만의 특징이 있는 고구마를 팔려고 경쟁을 합니다. 소비자들은 맛있고 가격도 적당한 상품성이 좋은 가게의 고구마를 찾으러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어느 가게를 선택할지 그것은 소비자가 몫입니다. 가게들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온갖 방법과 유인 작전을 펄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시장화 현상이 언제부터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는가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자는 솔라 스크립추라, 오직 성경만으로, 라는 슬로건으로 행하여진 종교개혁 이후, 이상하게도 교회가 시장화로 변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적어도 16세기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동네에 교회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17세기부터는 동네에 교회가 여러 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동방정교는 물론이고, 장로교, 침례교, 성공회 등..

따라서 사람들은 맛있는 고구마를 고르듯이, 자기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시장 마켓팅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 마켓팅입니다. 감성적이고, 본능을 자극하는 설교, 또는 극도의 종교성을 자아내는 설교, 위로와 용기를 가져다 주는 설교, 신학으로 둔갑한 인문학적 인간승리와 같은 이야기, 또는 비판적인 메세지로 사람들의 지식 감성을 자극하는 설교에 사람들은 열광을 하고, 그런 가게로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몇 백명, 몇 천명, 몇 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메가처치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종교적 자본주의의 승리입니다. 이것은 괴물이고, 성경적 기형입니다. 자본주의 사상에 찌든 교회의 모습입니다. 자본주의적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크면 무조건 성공한 것, 작으면 무조건 실패한 것이라는 아주 극악한 자본주의적 사상으로 복음을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소비자 중심의, 교인 중심의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입맛에 알맞게 양념처리된 교회를 세워가고자 합니다. 복음 + 소비자의 니즈가 설교 주제가 되어 버립니다.

오로지 성경만을 복음만을 이야기하고, 주장하면 현실을 모르는 고지식하고, 미련하고, 보수꼴통이며, 고리타분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적당하게 맛나는 세상적인 것으로 양념처리된 설교가 인기를 모읍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많이 모이거든요. 시장에서 잘나가는 교회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무조건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는 그래서 일등이 되어야 하는 일등주의 성공주의자들입니다.

만약 이런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제국주의적 종교관의 잔재이며, 자본주의 사상에 지독하게 염색된 복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만으로 살리는 것이란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일등주의가 아니고 성공주의가 아니고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작아진다는 것은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커지면 이웃 교회가 작아진다는 생각은 왜 못합니까? 그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살리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방식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복음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큰 교회는 돈이나 달란트 기부로 작은 교회를 도와 줄 수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 철저히 함몰된 사상이 아닙니까? 정작 본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작은 교회 가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 성경적 복음은 스스로 내용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며 빈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치 큰 폭탄을 맞아 움푹 패인 구덩이가 되고, 빈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내 영혼에 낙뢰에 의해 깊이 파인 구덩이가 생겨날 때, 그것이 주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적 복음은 자기만 앞으로 볼록 튀어나오는 일등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적 복음은 삶을 치장하는 부속물도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복음을 세상의 많은 진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들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종교적 욕구를 달래어주기 위해서 효과적인 환상을 제공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복음 그 자체로 능력입니다. 인간의 의식 그 자체의 전환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이 복음 안에 자신을 녹여 내십시오. 그러면 안 부끄럽고, 저기 큰 것들이 전혀 부러움이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내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예수만이가 거추장스럽게 여겨질 때, 당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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