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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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8-23절 강해설교 12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진노를 삼키다"

로마서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1-03-14 15:25
조회
31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진노를 삼키다!

김산덕

많은 성경들이 1장 18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구조로 로마서를 번역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 잘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에 의하면 18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인의 성경”이 18절을 “그러나”로 시작하는 것도 바로 그런 원문의 의미를 고려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로마서 강해 12번째 시간입니다만, 열 번째 시간에 제가 15-8절의 문장 구조를 설명하면서, 15절 “내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16절(2번), 17절, 18절 모두가 “왜냐하면”이라는 이유 접속사 ‘가르’(γὰρ)로 시작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문맥을 깊이 묵상하여 본다면, 18절은 17절의 내용과 아주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따라서 이 말씀은 서로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그 의미가 한층 명확하게 드러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저자 바울은 동일한 동사를 17절과 18절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 동사의 시제와 형태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어떤 동사인지, 아마 꼼꼼하게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글로 똑같이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타나다” 입니다.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다”고 말하며, 1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다”로 나옵니다.

복음 : 하나님의 의 VS 하나님의 진노

“나타나다”로 번역된 ‘아포카뤼프토’(ἀποκαλύπτω; 명사형은 ἀποκάλυψις로 계시 종말 마지막 등을 뜻하며)는 베일을 벗기다, 밝혀내다, 드러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형으로 영어로도 아포칼립스/아포칼립토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말, 마지막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합니다. 종말를 강하게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17절과 18절에 사용된 ‘나타나다’는 동사는 동일하게 현재형이며, 수동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현재란 무엇입니까? 지금도 여전히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이며, 동일하게 지금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형태입니다. 더욱이, 수동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드러난 신적 사건임을 강조하는 형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와 그리고 진노가 이전에 나타났었다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현재적으로 동일하게 마치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 두 동사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17절 먼저 나타나고 18절이 나중에 나타난다는 시간적 순서가 아닙니다. 바울이 현재형과 수동태를 동일하게 사용해서 하나님의 의와 진노가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고 증언하는 것은 복음을 인식하는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깨닫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으로 살게되어 의롭다함을 입는 은혜를 깨닫게 되고 보니까, 그 은혜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함께 녹아있더라는 사실을 알아채렸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복음 안에 드러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진노를 알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동시에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나타나는 곳이 어디 입니까?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 역사적 현현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현재적 계시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동시에 당신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현재적으로 계시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표출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깊이 묵상하며 감사합니다. 독생자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진노가 와해되고 녹아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희생의 죽음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메달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셨지만, 동시에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메달아 죽일 정도로 심각한 것이 바로 당신의 죄입니다.

죄명을 밝혀라!

그렇다면 그 죄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셨습니까?

저자 바울은 아주 명확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킨 죄명에 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라는 죄입니다.

먼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성경이 주장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란, 한글 한자가 말하듯이 변하지 않는 참된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본질, 이데아와 같은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정하는 논리적 공리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는 수학적으로 1+2=3이라는 수학적 진리도 아닙니다. 또는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그런 감성적이고 심성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리를 존재론적으로, 즉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기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나는 곧 나다”라고 하시는 분 그 자체가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그분이 바로 진리입니다(요14:6). 그래서 진리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고, 진리는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할 생명, 즉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결코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생각되어지고 생성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막는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가 있으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마치 경건하게 조용하게 수양하며 묵상하며 생활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종교적 율법이나 윤리, 도덕, 제사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하지 않음은 진리를 진리로 믿지 않음을 말합니다. 즉, 진리이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섬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자기 길을 하나님의 길인냥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참 믿을만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의”란 무엇입니까? 근대국가, 또는 시민사회에서 말하는 윤리나 도덕상의 이탈이나 위반행위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의 옳고 그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놓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절대화시켜, 그것에 따르게 하는 행동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종교화시켜 종교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협박하여 따르게하는 자들을 우리는 역사 가운데서 많이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경건과 그래서 하나님 뜻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길을 걸어가는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여전히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경건함과 불의는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의 삶을 살아가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 보여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먼저왔을 때, 율법을 어긴 나의 모습과 하나님의 진노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입니다.

복음 VS 율법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복음이 먼저냐, 율법이 먼저냐? 라는 논쟁을 펼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지적당하고 그 형벌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두려운 마음으로 복음 십자가로 달려와서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당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는 복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나의 잘못된 범죄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이인지 분명하게 보여오며, 더욱이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로 성취되고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율법은 성취된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안지켜도 된다는 반율법주의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법, 성화의 은혜 기능으로 율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은혜로 자유롭다는 것은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와 이웃 앞에서 책임있는 모습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 은혜를 손에 거머쥐려고 애써는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아, 이제는 그 십자가에 의해서 성취된 율법으로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길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참 자유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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