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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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4장 11-22절 강해설교 10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

사무엘상강해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1-03-21 17:48
조회
32

언약궤가 빼았겼다!

김산덕

우리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 항상 서로 싸우고, 전쟁하여 이기는 것에 집착하며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문화, 남보다, 저 사람보다, 똑똑해야 한다, 힘이 세어야 한다, 돈이 많아야 한다 등의 비교문화는 사람 본능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보다 똑똑하려고 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이러한 비교하는 비교문화는 경쟁주의로 나아가고,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자본주의 원리에 의하여, 보다 강하게, 인간들의 삶의 원리, 사회 원리, 국가원리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성공을 삶의 축복으로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일단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 부유한 사회, 부유한 국가가 되는 것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제국주의적 사상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역시 세상적 잣대로 큰 교회를 하나님의 축복한 교회로 생각하고, 작은 교회는 아직 축복을 받지 못한 교회로 인식하는 이상한 생각이 우리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경제자본주의를 하나님의 축복논리를 해석하는 원리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교적 이분법적 사고가 교회 가운데 아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패배가 주님의 뜻일 수도 있으며, 아픔과 고난 역시 그분의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일 수도 있다는 십자가의 원리와 그러한 겸허함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그러한 관점에서 읽고 묵하여 보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 갑자가 등장한 이스라엘의 블레셋의 싸움, 전쟁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왜? 싸웠는지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로 이스라엘 백성이 제1차 아벡 전투에서 졌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빨리 이기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지에 중점을 두고 써내려 갑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출정하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당시 실로에 있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 옵니다. 5절에 보니까, 언약궤가 진영으로 들어 올 때,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고 합니다. ‘큰 소리’하며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도우라 테루아’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던 함성이며, 고함소리입니다. 마지막 일곱 째 되는 날에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자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여리고 사건을 전해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 다시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과거의 축복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 군사들은 이제 언약궤가 자기들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함소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땅이 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땅이 울렸다는 이 표현에 눈길이 멈추어 섭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땅이 울렸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묵상해봅니다. “울렸다”는 말은 ‘훔’이라는 히브리어인데, ‘괴롭게 하다’, ‘다시 울리다’, ‘큰 잡음을 내다’, ‘통곡하다’ ‘탄식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55편2절에,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합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1장 19절 룻기.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었다. 즉, 비방하고 손가락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흄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를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통곡하게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함께한다 할지라도, 탄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얼마나 그들의 기세가 등등했던지, 블레셋 사람들도 무슨 영문인지 놀랍니다.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 온 줄을 깨닫고는,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신들!!!

여기에 저자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야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신앙고백으로 성화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7장 미스바 사건에서 그들은 이방신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는 사무엘의 거침없는 경고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타협적이고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신앙아닌 종교생활하다가, 권태기가 찾아오고, 별로 신통치 않다 싶으면 곧 바로 이방신이나 아스다롯을 섬겼던 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스다롯을 아십니까? 아스다롯이란 그 당시 가장 세계화된 인기있는 우상이었습니다. 물욕의 신이있고, 성의 신이었고, 전쟁과 성공주의를 표상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신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아스다롯은,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로마에서는 비너스로 연결되는 여신이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에는 가장 큰 신으로 “엘”이 있었고, 이 “엘”이 ‘아세라’ 신과 결혼하여 ‘바알’과 ‘아스다롯’을 낳았습니다. 바알은 여동생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아스다롯을 사랑하여 결혼합니다. 아스다롯은 모든 사람들을 유혹할만큼 성적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신이었습니다. 이 두 신이 관계를 맺어 정액이 땅에 떨어지면 풍년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들 바알과 아스다롯 신전에는 그들 신을 따라서 많은 남녀 사제들이 관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야훼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주 엄중하게 경고하였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얼마되지 않아 야훼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삿2;13).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중적으로 가나안의 신들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들을’ 섬기고 있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적당하게 믿음 생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적당한 믿음, 적당한 신앙생활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적당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제 아무리 언약궤를 가지고 간다 할지라도, 결국은 패배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패배였습니다.
야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는 그들이 제 아무리 언약궤를 가지고 간다고 할지라도, 여리고의 영광을 재현하는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보병으로 죽은 자들만 3만명이 된다는 어마 어마한 타격을 입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싸움의 결론을 아주 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는 뺴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11절입니다. 빼앗기다와 죽다, 라는 두 동사를 병치시켜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아주 명료한 문장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전체가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선포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흉내내는 종교생활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 죽음을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엘리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이가봇이라는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11절에서 빼앗김은 죽음이었습니다. 이제 22절에서 저자는 빼앗김을 하나님의 떠남으로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떠났다. 하나님이 가버렸다! 이것은 죽음이며, 멸망입니다.

혼합주의적 종교생활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며, 결국 죽음과 멸망으로 끝납니다. 대충 믿는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는 믿음은 야훼 하나님이 요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 이야기가 4장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여기 4장에서 막을 내리지 않습니다. 5장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없은 그들에게 패배와 죽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멸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떠남은 영원히 떠나는 떠남이 아닙니다. 환언하면, 떠남으로 끝이 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떠남은 믿음없음에 대한 심판적 떠남이면서, 동시에 당신을 구원하시겠다는 구원적 떠남입니다.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원하시는 떠남입니다.

심판적 떠남에서 구원적 떠남

왜냐하면, 여기에 “빼았겼다”는 단어가 ‘닐르카흐’인데, 라카흐의 니팔형이라는 형태로 변화된 동사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니팔형’은 자발성이 함축된 용법입니다.
표면적으로 블레셋에게 야훼의 궤가 뺴았기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니팔형태(수동태)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궤가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스스로 그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시는, 빼앗기는 척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두심으로서, 스스로 적진 안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없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들어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처럼, 야훼 하나님은 스스로 블레셋 심장부로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그분은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유혹의 영과 사탄, 사망의 권세자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경험하시고 결단하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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