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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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1-10절 강해설교(1) "새 시대의 시작"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0-05-10 17:31
조회
181

요한복음 20장 1-10절 강해설교(1)

 새 시대의 시작

 

2016년도부터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시작하여, 오늘이 아마도 150번째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절기 설교, 특별 설교, 그리고 구약 설교 등이 함께 엮으면서 약 4년 동안 부산고백교회는 요한복음서를 공부하며 묵상하며, 그 가운데 깊은 은혜를 깨달으며 달려 온 것 같습니다.

오늘 드디어 20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요한복음은 21장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 마지막 결정적인 부분으로 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20장과 21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기독교인으로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만약 기독교 믿음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미련한 아주 헛된 것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핵심이며, 근간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예수님의 부활에 입각해서 읽어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진 복음서를 포함해서 성경 역시 부활이 있었기에 때문에 태어난 것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19장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음서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9장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1-19장이 먼저가 아니라, 20-21장이 먼저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19장까지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20장과 21장의 부활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20-21장의 부활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1장-19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본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부화라신 그분의 증언을 듣고 성령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써내려 갈려고 결단하고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다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그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20장 1절에서 하는 표현을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오늘 본문 첫 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안식후 첫 날”이라고 합니다. 20장,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첫 글귀가 “안식 후 첫 날”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주간의 첫 날”로 번역합니다. 외국의 많은 성경들도 “한 주의 첫 날”이라고 번역합니다. ‘첫째’라는 것, 이것은 ‘하나’, ‘바로 그것’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형용사입니다. ‘하나의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 할 때의 하나입니다. 신앙고백적 용어입니다. 두개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밖에 없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미아’라는 단어를 통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란, 마치 모든 것의 첫째 날, 많은 날들 중에 이 날 밖에 없는, 그래서 아주 유일한 날, 하나 밖에 없는 날, 이 날이 우리 삶의, 우리 역사의 시작되었다고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삼일 후가 아니라, 첫 날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조가 말하는 “삼일 후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안식후 첫 날, 한 주간의 첫 날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려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삼일 후에 라는 숫자적이며 교리적인 해석을 뛰어 넘어, 생각의 변화, 사고의 변화, 삶의 실천의 변곡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한 주의 첫째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안식날이 아니라, 바로 이 첫째날이 삶의 출발점, 역사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
구약적 창조와 구원에 대한 재해석

 

그렇다면 무엇의 출발입니까? 무엇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까?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창조와 구원의 날로 거룩하게 지켜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성경 저자는 이것을 바꾸었습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애굽 구원의 의미를 포함하는, 그래서 그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한 주의 첫 날”은 그 안식일을 초월하는 날이며,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는 날입니다. 마치 구약적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는 날이며, 구약의 애굽적 구원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성취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날들 중의 첫날이며,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은 구약이 말하는 안식적 창조와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재창조와 새로운 구원이 완성되고 성취된 날입니다. 그래서 주의 날은 모든 날을 대표하는 “그 날”입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과 함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이행, 개혁, 바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며, 유대교의 전통과 습관이 삶에 깊숙히 배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삶 그 자체입니다. 그들의 문화, 그들의 역사, 그들의 종교, 그들의 풍습, 그들의 가치관 등 고유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포기하고 주의 날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전적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포기하는 것은 유대인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역사와 풍습과 문화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여 왔던 세계관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즉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런 포기가 있는 결단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들 자신을 지금까지 지배하여 왔던 유대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성을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이고, 장사지내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로 더불어 새롭게 이제는 예수중심의 세계관을 소유한 예수쟁이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일을 삶의 첫째날, 출발점으로 삼고,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며, 고백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어둠 속에서 행하는 빛의 행위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결단하는 결정이라고 말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 일어나는 결단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두운 가운데 밝히는 작은 촛불과도 같은 것입니다. 빛이 어둠 가운데 빛납니다. 그러나 어둠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1장 5절 “빛(포스)이 어둠(스꼬띠아)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은 빛이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안식일에서 주의 날로 왜 바뀌어야 하는지, 내가 왜 주의 날을 인생의 시작 날로 삼아야 하는지, 저 사람들이 왜 첫 날부터 저렇게 모이는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을 고집스럽게 예배하는 날로 반드시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살아가는지, 세상 어둠은 알지를 못합니다.

주일 날, 예배를 드리는지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드리는지 모릅니다. 왭니까?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둠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것 자체가 이미 심판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배하는 것은 “아직 어두울 때” 행하는 삶의 결단입니다. 따라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어둠 속에서 행하는 빛의 행위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둠이 지배하는 가운데 빛을 드러내 보이려는 결단을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여실히 보여 줍니다.

그런데 왜, 막달라 마리아가 선택되었을까요?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왜 아닙니까? 왜 수제자 베드로가 아닙니까? 더욱이 2절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이라고 저자가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런 제자가 왜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에 관하여 요한복음은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3장 55절을 보시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릴리로부터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쫓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이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막달라 마리아 뿐만이 아니라, 몇몇 여자들이 찾아 온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16장 1- 3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그런데 요한복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다릅니다. 두 복음서는 여러 여인들이 함께 마리아가 갔다고 하지만, 요한복음 막달라 마리아 혼자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향유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냥 아주 간결하게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한 여인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그때에 예수 무덤으로 갔다는 사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어둠이 아직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을 때, 그녀는 그 어둠 속을 마치 한대의 촛불처럼, 무덤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간단한 사실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은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할 부분입니다.

전혀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고찰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 하나에 주목을 하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장 1절,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보다”로 번역된 단어는 블레포 입니다. 20장 1-10절까지 보다가 네 번 나옵니다. 1절, 5절, 6절, 8절. 1/5절은 블레포 :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단어/ 6절은 테오레오 :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 8절은 호라오 :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1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보는 행동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채로 그냥 무덤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냥 눈에 비치는 대로 본 것입니다. 무덤 앞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돌이 옮겨진 것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했던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마리아의 이 말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막달라 마리아의 고민이 섞인 한탄과 같은 이 넋두리와 같은 타령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시는가? 하는 예수님의 장소성에 불평이며,
또 하나는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하는 예수님에 대한 불평이며 푸념입니다.

1장 38절에,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졸졸 따라오니, 예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들은 “랍비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와서 보라, 고 합니다. 누군가? 그분은 누군가? 어디에 계시는가? 이 질문은 결국 그분은 누구인가?

“어디 두었는지” 여러분, 지난 시간에 19장 42절에서 “예수를 거기 두니라”에서 배웠던 그 말을 여기서 그녀가 사용합니다. ‘티테미’ 이 단어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의 키워드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또는 세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어떤 목적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확립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왜, 예수가 죽었는지, 무엇 때문에 목숨을 버렸는지, 무엇을 누구를 세우실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 특히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디에” 예수님이 현재,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하는 장소성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안계십니다. 누구를 위해서 티테미하셨는가?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나? 그분의 죽음의 목적성. 그냥 억울한 죽음이었나? 라는 마음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이 더 이상 무덤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고, 이제는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고, 동시에 그 목숨에 영생으로 세워주셨다는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을 통해서 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살아있는 당신을 향하여 주님은 무덤 밖에 여전히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살아계셔서 무덤 밖에서 항상 그녀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무덤 밖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믿음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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