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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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장 19-20절 설교 "사무엘의 탄생"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0-05-17 17:43
조회
146

사무엘상 1장 19-20절

"사무엘의 탄생"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며, 첫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사사로서, 군주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 였습니다. 사사시대에서 군주시대로 시대가 바뀌어 가는 길목을 지켜갔던 영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에도 이름이 오른 사사였고, 예언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어난 시대는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려가는 아주 혼란스러웠던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사사기 21자 25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옯은 대로 행하였다.”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 옳은 것을 행하는 시대” 였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기 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지독하게 일인칭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행패를 부렸던 시대였습니다.

서로 함께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고 세워가는 세대가 아니었습니다. 이웃이 어떻게 생각할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만 주장한다면 교만의 투쟁이 있을 뿐이며, 서로 죄를 이야기하면 겸손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곳에는 분쟁과 다툼과 시기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사사시대는 오늘날 대한한국이 흑백논리와 진영논리라는 질병에 감염되어, 내것만 있는,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이기는 자가 역사를 쓴다는 논리에 마치 늪에 서서히 침몰하여가듯이 사회가 인격적으로 침몰하여 가는 것과 흡사하였습니다.

사실,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라는 상태는 성경에서 아주 무서운 이교적 질병으로 등장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 “자의적 숭배” 즉, 자기 마음대로, 제 멋대로의 예배하는 것을 이교도적인 행위로 경계합니다. 내가 보기에 합당하면 그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내로남불식 행위이지요.

내 소견대로 : 밝아진 눈

왜, 성경은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를 바쁘게 생각할까요?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란 원문대로 번역하자면 “각자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를 말합니다. 우리의 “눈”(아인)이란 어떤 눈입니까? 성경에서 처음으로 “눈”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창세기 3장 5절,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이 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눈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밝아진 내 눈으로” 옳다고 판단하는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닌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며 살아가겠다는 그것입니다. 타락의 기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가와 내가 보기에 어떤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 (야샤르, יָשָׁר)에 대한 판단 기준도 달라 집니다. “옳은 것”으로 번역된 야샤르는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그곳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야샤르, 옳은 것)를 행하라.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

문맥적으로 볼 때, “옳은 것”이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분이 보시고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따라서 내 눈에 옳고 그른 것은 결단코 성경이 제공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근대교육에서 유래한 국가가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교육의 기본이었습니다. 따라서 근대 현대인들에게 “옳은 것”이란 국가 사회에 효율적인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면, 쉽사리 사람들은 양심을 꺼내어 듭니다. 내 양심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면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은 절대로 심판에서 면죄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본질적으로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옳은 것을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세상에 태어났던 시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옳은 것으로 대접을 받는 시대가 아니라, “각자 자기가 보기에” 옳은 것이 옳은 것으로 작용했던 시대였습니다.

내 눈에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아픔과 슬픔 가운데 한 여인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뼈속까지 철저한 이기주의와 자기주의에 도취된 늪 지대에서 갑자기 한 여인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한나”로, “풍성한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어난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주변과 세상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은 아니다. 이대로는 아니다. 더 이상 고통과 아픔 가운데 살아갈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그녀는 특단의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일어났습니다. 1장 9절에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 괴로워서 기도하고 통곡합니다.” 아마도 사무엘상 1장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일어나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히브리어로 “쿰”(קוּם)이라는 용어인데, 1장에서 두번 사용되었습니다. 또 한 곳은 23절에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것 역시 쿰입니다. 여호와계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는 것, 약속을 세우시는 것도 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세울 때에도 “쿰 동사를 사용합니다(창9:9,11).

그렇습니다. 사무엘을 기록한 성경의 저자는 1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입은 여인 한나여! 일어나라! 쿰하라! 이미 하나님께서 너와 언약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너와 쿰 하셨다.는 그런 강한 말씀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고난과 고통, 핍박과 차별 가운데서 그래도 인내하며 살아왔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일어나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핍박과 차별, 고통 가운데서 ‘쿰’하는 것이야말로 당신 삶의 불씨를 살리는 것입니다.

시편 20편 7-8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지만, 우리는 일어나(쿰, קוּם) 바로 서도다(우드, עוּד)”(시20:7,8). 세상 사람들은 병거와 말, 힘과 돈을 의지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을 자랑하며 언약 백성으로서 항상 ‘쿰’하면서,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더욱이 한나가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은 항상 ‘여호와’(야훼)입니다. 실로, 사무엘상 1장에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여호와라는 용어만 사용합니다. 딱 한번 17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엘로힘)을 사용합니다.

한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차별 속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인격적인 하나님, 그래서 사람과 약속하고 언약을 세우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여호와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1장과 다르게, 창세기 2장에 아주 상세하게 다정하게 창조 사역을 펄쳐 가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피조물들의 이름을 정하게 하셨던, 피조물을 믿어 주셨던 여호와 입니다.

한나는 여호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왔습니다. 이제 자신의 삶의 아픔들을 토해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나를 보고 미친 짓이라고 합니다. 14절을 보시면 “술에 취하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나는 15절에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 뿐이다.”라고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밝혀 놓습니다. 쏟아 붓다는 뜻입니다. 한나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서, 자기 백성과 언약 맺기를 좋아하시는 “여호와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다 부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생명 사무엘을 얻습니다. 사무엘이란 이름이 가진 의미는 샤마 + 엘 : 하나님이 들어셨다. 또는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다.” 등의 의미를 가지지만, 성경 저자의 해석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간구하였다.”(20절) 간구하여 얻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일어나서, 간구하십시오. 당신과 인격적으로 약속하고 언약 맺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새 시대를 열어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 1장은 독자들에게 삶의 아픈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독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당신과 함께 일어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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