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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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11-18절 설교 “뒤 돌아보니, 그곳에”

작성자
confessing
작성일
2020-06-08 12:04
조회
114

요한복음 20장 11-18절 설교
“뒤 돌아보니, 그곳에”

 

오늘의 말씀은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우는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운다는 것은 슬프다는 것 입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더라도 인간은 같이 무덤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저 무덤 밖에서 울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함께 죽고 함께 무덤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보면서 웁니다. 구부린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굴복 한다는 뜻을 함께 가집니다. 즉 죽음에 굴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새까만 죽음의 동굴 안을 바라 볼 수 밖에 없다는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 “바라보다”의 원어는 영어 극장(Theatre)의 유래인 테오레오입니다. 영화를 바라보듯이 인간은 죽음을 바라 볼 뿐,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대상이 아닙니다. 이 모습은 막달라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14절에는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라고 하는데 “주님을 어디로 옮겼는지 모릅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곧 뒤로 돌이켜 예수님을 보았지만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무덤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마주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르는 소리도 없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뒷편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뒤돌아 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 민감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어려운 순간이 오면 그저 울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뒤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서 계신다”는 것은 완료형입니다. 그것은 이미 계셨고 앞으로도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가 죽음을 앞두고 흐느껴 울 때, 예수께서는 언젠가부터 그 여인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때때로 깨닫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항상 우리 뒤에 계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분을 마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를 왜 못 알아본 것 일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그녀는 무덤 앞에서 예수님의 시신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만을 고집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살려주는 분이기에 그분을 좋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젠가부터 인문학에 사로잡혀 불쌍한 사람을 돕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해야 칭찬을 받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이 이런 인문학 즉 인간학에 희석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갈릴리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갈릴리적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은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인문학에 소멸되는 신학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갈릴리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신학을 가져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이름을 듣고 나아갑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부르는 사건은 구원이 일어나는 신적 사건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0장의 예수께서는 양의 이름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 양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양들은 주님께 나아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부르셨을 때 한 번 다시 뒤돌아 본다는 표현을 저자는 사용합니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되돌아섰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가 절망 가운데 눈물 흘리는 그 순간, 예수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모든 것이 다시 부활하신 예수께로 집중되어 되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이름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에 참여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로 되돌려 놓고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로 돌릴 때에 우리에게는 참된 구원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너무 기뻐 그에게 다가가 만지려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을 “랍오니”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인데 원어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기록한 이유는 그 기쁨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랍오니라고 부르며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붙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부활한 나를 만났으니 이제 육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나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하니 너는 가서 나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라는 의미 입니다. “나에게 집착하는 삶이 아닌 나를 전하는 삶을 살아라”고 부탁하십니다.

성경 헬라어로 ‘천사’(앙겔로스)라는 명사형은 ‘전하다’(아팡겔로)는 동사형과 그 어원을 같이 합니다. 명사형 어미를 떼고, 동사형 어미를 붙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글로 전함(명사)과 전하다(동사)와 같은 느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가서 나를 ‘전하라’고 합니다. 12절에서 천사가 행하였던 전하는 사역을 이제는 마리아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은 천사의 사역을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천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우리는 천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답답한 삶의 현장에 계신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뒷 편에 주님이 서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천사처럼 살아가도록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천사의 길에서 행복을 나누시는 부산고백교회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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